17회
“이두나 씨, 문단속 잘하고 잘 자요. 내일 일찍 발전소 개발팀에게 브리핑 듣고 출발해야 하니까. 일찍 자둬요.”
전화가 딸깍 하고 끊겼다.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주상도 소장은 세련된 신사다. 적어도 그는 학식이 있고(박사잖아) 교양 있는 사람이다.
침대에 천천히 누웠다. 낮의 일이 떠올랐다. 발전소 직원에게 적절한 위엄과 유머를 섞어 하던 말투, 한국 풍력 발전소의 모든 내력과 계보를 꿰뚫고 있던 그의 박식함이 떠올랐다. 그러자 명민한 듯한 잘 뻗은 콧날과 단단한 근육처럼 보이는 어깨와 가슴이 떠올랐다. 그 가슴에 안긴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상상까지 하자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고개를 크게 가로젓고 만 것이다.
주상도 소장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강원도 쪽 국도는 시원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밴이 서울 가까이 오자 이미 땅거미가 짙어지고 있었다. 도로는 먹통이 되기 시작했다. 늘어선 차들이 브레이크등(brake light)으로 눈이 부셨다. 도로의 붉은 꽃, 전기 꽃이었다.
밤이 오면 시간들이 새롭게 포개진다. 다툼과 불화, 분노와 울분 같은 것도 모두 다른 냄새로 변한다.
문득 낯설어지는 시간. 밤이 되면 전기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 도시에 혈관처럼 뻗어있던 전기가 서서히 핏줄을 타고 돌기 시작한다. 매혹적인 전기의 심장이 팔락팔락 뛰기 시작한다. 빌딩 사무실에서, 가로등과 가게에서…
밴이 아파트 가까이 풀숲에 오자 나는 여기 세워달라고 말했다.
“두나 씨는 왜 전기학과에 들어왔어요?” 나는 차문을 열려다 소장을 봤다.
“그냥, 짜릿하잖아요. 전기가 흐른다는 것은 생명이 흐른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 그가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정면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기를 보내는 것은 자기 몸의 파동을 끄집어내 공기 중으로 보내는 것이죠. 그 누군가와 전기로 소통하는 것은 에너지를 교환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전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힘이 마력적으로 느껴져요… 저 근데 소장님, 너무 추워서 그만 가볼게요.”
주상도 소장이 갑자기 빠르게 손을 비볐다. 손바닥으로 전기를 만들었다. 그는 갑자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내 뺨을 양손으로 잡았다. 뺨이 뜨거워졌다. 그리고는 재빨리 자신의 입술과 내 입술을 맞추었다. 둔탁한 혀가 강한 중력으로 입속을 밀고 들어왔다. 한 손으로 강하게 내 목덜미를 잡고 한 손은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읍!”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거칠고 강한 힘이 내 몸을 눌렀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몸을 밀어내려 애썼다.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입술이 터질 듯 아팠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이건, 이건, 아니야. 지독한 무력감과 모욕감이 몰려들었다.
“지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라고 말하며 뺨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