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직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익 하고 치마가 바람을 타고 위로 솟아올랐다. 치마가 얼굴까지 솟아오른 것이다. “아악~” 나는 소리쳤다. 충격적인 바람의 스파이크였다. 나는 급하게 치마를 아래로 내렸다. 양손으로 치마를 잡았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칠칠맞지 못한 여편네 개짐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순간 너덜너덜한 면 팬티, 일명 ‘안전일(安全日) 팬티’를 입고 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휴우, 최악이다. 바람개비의 하얀 기둥에 머리를 꽝꽝 찧고 싶다.
주상도 소장과 직원은 서로 다른 곳을 보는 척 하느라 시선 돌리기 바빴다. 나는 냉큼 발전소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설계와 전력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주상도 소장과 눈을 맞추는 걸 최대한 피했다.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왔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산에는 해가 금방 진다니까. 주상도 소장이 한마디 던졌다. 그러게요. 직원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치마 양쪽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노을이 대신 붉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오늘은 내 이미지에 출혈이 정말 심했군. 젠장…
숙소는 산 아래 시내 쪽이었다.
“숙소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하고 들어간 곳은 일반 모텔이었다. 한때 관광 사업으로 번성하다 이제 그런 자취도 사라진 지 한참인 도시였다. 모텔은 낡았지만 유럽식 외양에 아담한 카페가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뜻한 안식처 같은 느낌이었다.
카페 유리창 너머에는 정원까지 있었다. 정원 잔디밭에 징검돌과 돌탑도 고풍스럽게 놓여 있다. 자그마한 소나무와 등불, 가로등 같이 생긴 전등이 몇 개 켜져 있어 온화한 주택에 온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올라 객실로 들어왔다. 방안은 고급스럽진 않지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창 옆에 테이블과 안락의자가 두 개 놓여 있고 정면 장식대 위에 텔레비전과 전화기, 샤워 가운과 세면도구, 물을 마실 수 있는 유리잔과 병따개가 있었다. 중소도시 모텔치곤 갖추려 애쓴 티가 역력했다.
짐을 안락의자 위로 던졌다. 그리곤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바로 맞은편 큰 거울에 얼굴이 비췄다. 그것은 유령도 귀신도 아닌 내 얼굴이었다. 바람개비 언덕에서 치마를 뒤집어쓴 일이 떠올랐다. 머리를 세게 흔든다. 기억은 이상한 것이어서 지우려고 하면 더욱 진해지는 법이다. 기억은 꿈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출현했다. 아냐, 그건 내가 아니었어…
우선 샤워를 해야겠군. 나는 샤워 머리띠를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렌즈를 빼고 뽕브라를 풀었다. 클렌징크림으로 화장을 지우고 나니 전기 걸 ‘ON’에서 ‘OFF’ 모드로 완벽한 변신이 일어났다. 간혹 집에서 눈썹도 그리지 않고 머리를 질끈 양쪽으로 묶고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으면 나 자신도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샤워 물을 틀었다. 주상도 소장은 뭘 하고 있을까? 소장과 바로 옆방이란 것이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연구소 직원들과 출장을 많이 다니긴 했다. 하지만 소장과 단둘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어떤 가상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소장은 내게 개인적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 샤워 후에 내 방으로 전화를 한 통 할지도 모른다. 그러곤 뻔하고도 뻔한 말을 늘어놓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곳에 왔으니 놀러온 셈 치고 술이나 하자. 그럼 나는, 너무 피곤해서… 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냥 간단하게 딱 한 잔만… 죄송합니다, 소장님, 좀 피곤해서요… 어허, 이두나 씨, 사람이 그렇게 꽉 막혀서 사회생활하겠어?
그럼 나는 하는 수없이 다시 ‘OFF’에서 ‘ON’ 모드로 바꾸기 위해 파운데이션에 파우더를 토닥이고 렌즈를 끼고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 카페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사바나 무시무시한 야생의 삶 한가운데로 던져진 순한 짐승처럼.
그럼 주상도 소장은 “오늘밤 실컷 마십시다. 목장지대여서 공기가 정말 좋은 곳입니다. 술도 취하지 않을 거요…” 그러면서 한 잔을 할 것이고, “어때요, 한 잔 더.” 그러면 나는 “아뇨, 전 더 이상…” 그러고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 이 향수 냄새… 앉을 때 다리 좀 그만 벌려! 뒤집어진 개구리 같잖아. 경박해 보이기는…’
그러면 술기운이 오른 그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뭐, 이런 말 묻기는 그렇지만 두나 씨 애인 있어요? 뭐, 있다하더라도 오늘은 잊어요. 그냥 오늘 즐겁게 휴가 왔다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술기운을 빌려 괜히 내 어깨에 손을 올릴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이게 어디서 친한 척이야! 어깨에 얹지 마. 무거워!’ 라고 속으로 외치며 째려볼지도 모른다.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럼 그렇지. 언제나 뻔한 시나리오 아니야? 나는 천장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고 있다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수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