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걱정하지 마세요. 발전소 직원이 우리가 묵을 숙소는 따로 따로 잡아놨다고 했으니까.”
그는 내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어머, 안 돼, 미쳤어요? 아무리 그래도 연구소장과 여자 연구원 단둘이서 필드 조사 간다는 게… 그것도 1박 2일로…라고 격렬한 비명을 지른다면, 어, 두나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보수적이네. 연구소 일로 출장을 가는 일에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이렇게 말할 게 뻔했다.
나는 손목시계를 봤다. 아침 8시였다. 밴에 탄 지 1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며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좀…” 주상도 소장이 말했다. “하긴 젊은 미혼의 여자로서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죠. 이두나 씨가 정 부담스러우면 저 혼자 가도 됩니다. 그곳 풍력 발전소 직원이 안내해주기 위해 나온다고 했으니까 같이 돌아다니면 돼요. 연구소엔 둘이 같이 간 것으로 하고 내가 보고서 작성하겠소. 조금도 걱정 말아요.” 그러곤 천진하게 웃었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연구소장이 1차 보고서를 직접 작성하는 법은 없었다. 연구원이 통계를 내고 도표를 만들어 보고서를 만들면 소장은 전체적으로 수정할 부분들만 지적하는 것이 관례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배낭을 밴의 뒷자리로 넘겼다.
“예, 알겠어요. 대신 내일 아침 최대한 빨리 오는 거로 하죠. 연구소에 일이 쌓여 있어서…”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주상도 소장은 “뭐, 그럼, 그러던가. 편할 대로…”라고 말했다. 박하사탕을 먹을래, 샤베트향 사탕을 먹을래 라고 물으면 아무 사탕이든, 이라고 말하는 심드렁한 꼬마처럼.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
연구소에 밀린 일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직장 상사와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있는 것이 편한 일은 아니니까. 그건 돈 많은 손님을 맞는 호텔 수위처럼 노예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긴장한 채 침묵을 지키는 것도 조직에선 정서적 퇴행을 의미했다. 조직은 개인과의 싸움에서 거의 대부분 무패거나 불패였다. 나는 최대한 입가를 귀 쪽으로 끌어올리려 애썼다.
“두나 씨는 여행을 좋아하나요?” 옆자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저절로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별로, 그렇게 많이 다니지 못했어요. 학위 끝내고 회사 취직했다 바로 연구소 왔으니까요. 공부하는 여자들이 다 그렇죠 뭐…”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해야죠. 앞으로 여성들도 연구소에 책임연구원도 되고 부소장, 소장도 되고 그렇게 돼야 합니다.”
주상도는 생각보다 진보적 여성관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여성에게 맹목적인 헌신만을 요구한다거나 굴종과 복속만을 요구하는 멧돼지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몸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하긴 주상도 소장은 야비하고 추접스러운 호색한과는 거리도 멀었다. 그는 세련된 매너와 도시적인 맵시를 지닌 사람이었다. 나는 옆으로 그를 힐끗 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얇은 철사테 안경… 외꺼풀이지만 명민해 보이는 눈빛. 피부도 윤기가 흘렀다. 사십일 듯한데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는 듯한 동안(童顔). 부드러운 웃음이 흐르고 상대를 편하고 유쾌하게 해주는 말솜씨. 신사란 이런 사람을 말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하는 기품도 있었다.
휴게소였다. 가을 단풍철이었다. 관광객들이 등산복을 입고 버스에서 내렸다. 화장실도 등산객들로 붐볐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주상도 소장이 양손에 캔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이두나 씨, 필드 조사 나가는데 플레어스커트와 마릴린먼로 티셔츠가 뭡니까?”
발전소 직원은 숙소 앞에 서 있다 차가 도착하자 반색을 했다. 짐을 재빨리 받아 숙소로 옮겼다. 지자체예산에서 보조를 받아 전력개발을 하는 프로젝트였다. 발전소 쪽에서는 연구소 보고서를 위해 애가 탈만 했다. 직원은 멸치처럼 생긴 깡마른 남자였다. 엶은 바다색 잠바를 입고 앞머리 부분이 약간 벗겨져 있었다.
짐을 내려놓고 삼양 목장 쪽을 바라보았다. 삼양 목장은 산 아래에서 지프차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발전소는 산언덕에 있었다. “발전소가 지어진 것은 약 십오 년 전이죠.” 갤로퍼를 운전하면서 발전소 직원이 말했다. 조수석에 앉은 주상도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뒷좌석에서 멍하니 경사진 목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십오 년 전이라면… 풍력을 이용해 전기를 만들기로 하면서 외국기술을 유행처럼 받아들이던 시기였다. 바람으로 생겨난 전력은 일단 이곳 발전소에서 모아지고 다시 한국전력으로 보내졌다. 바람개비가 돌린 전력은 한 해 20억 가까이 되는 엄청난 재화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지자체 수입으로 흡수되었다.
갤로퍼가 언덕 위로 올라섰다. 눈앞에 풀로 덮인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낮고 작은 풀들이 수천의 금빛으로 햇빛에 빛났다. 푸른 물방울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그것은 새로운 지평선이었다. 의식의 저편에 있는 새로운 세계, 세상의 푸르른 틈새였다. 그 위에 거대한 바람개비가 돌고 있었다. 흰색이었고 열 개 가량이었다.
바람은 허공중에 제 머리칼을 날리며 바람개비를 돌렸다. 누구에게 다급하게 가는 길목이었을까. 바람의 그리움이 바람개비 안에서 칼칼칼 소리를 냈다. 펄펄 끓고 있는 애정의 절정을 통과하고 있다. 뜨거운 입김의 전기를 만들어 내면서…
나는 언덕 위에서 양팔을 벌려 바람을 맞는다. 문득 건형이 떠오른다. 그는 내 전깃줄 안에 굴러다니고 있는 전자들을 알까. 내 안에 흐르는 뜨거운 전기의 흐름을…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스파이크를 일으켰다.
“이두나 씨, 스커트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