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하하하… 내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지?” 하고, “야, 맥주 네가 산다고 했잖아.” 하면서 호프집 술값 전표를 딱 내밀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물론 그러지 못했다. 나는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흙이 묻은 내 월드컵 운동화와 승희가 신은 나이키 운동화를 번갈아보다 뒤를 돌아서 나오고 만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이키 운동화만 보면 나는 쪼는 버릇이 있다.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를 갖기 위해 대학 때 총장배 마라톤 대회에 나간 적도 있었으니까.
나는 내 구두를 내려다봤다. 흰색 긴 테이블보 아래 내 발은 가지런하게 모아져 있었다. 짝퉁 구찌 에나멜 구두였다.
건형의 말에 나도 합당한 레시피를 펼쳐놓을 차례였다. 나는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말했다.
“나도 너 생각 많이 했어. 가끔 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더라.”
“정말? 그랬어?” 반색을 하는 건형,
날 사랑하긴 했니? 3년 동안 넌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어, 날 사랑하긴 한 거야?
갑자기 건형이 떠나고 홀로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눈물, 알코올, 유혹 그리고 고독한 밤의 시간들이었다. 그땐 몰랐다. 그가 나에게 했던 약속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 약속들이 없었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까? 헛된 말일 줄 알면서도 가슴 설레곤 했던 내가 싫었다. 그 의미 없는 눈짓에 가슴 떨려하던 내가 싫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나 자신에게서 가장 싫었던 건 습관이었다. 슈퍼에서 장을 보다 건형이 좋아하는 까망베르 치즈를 보고 집으려다, 참, 우리 헤어졌지. 케니지를 듣고 우수에 잠기다, 참, 우리 헤어졌지. 파스타가 맛있는 브런치 레스토랑을 발견하고 건형이랑 같이 와야겠다 생각하다, 참, 우리 헤어졌지. 인터넷 쇼핑몰에서 남자 V라인 니트를 고르다, 참, 우리 헤어졌지…
그랬다. 누군가를 잊는다는 것은 의식에서 지우는 문제가 아니다. 몸에서 지우는 문제다. 몸 안엔 모든 기억의 메모리칩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냄새, 손가락 움직임, 목소리의 톤, 음식을 먹을 때 입술 움직임, 식성에 대한 취향, 그리고 그에게 안겼을 때 살의 윤곽, 탄력, 혀의 감촉, 쓸어내릴 때 손가락의 촉감까지.
내가 아닌 몸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 참 미칠 노릇이었다. 몸을 버리지 않는 바엔, 몸이 습관을 버리지 않는 바엔 싸우는 것은 그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몸 기억이 되고 마는 것이다.
건형은 식사를 마치더니 카메라 렌즈를 줌으로 맞추듯 내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나갈까? 나는 으응? 하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2층 이태리언 레스토랑 비스트로가 있는 이 건물은 24층의 복합건물이었다. 건형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23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건형은 앞을 보고 있던 내 몸을 휘익 하고 돌렸다.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격렬하게 내 몸을 안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건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리베이터가 띠
우리나라 엘리베이터 산업은 너무 급속도로 발전한 거 아냐. 이렇게 고속으로 만들어놓으면 어쩌란 말이야. 23층까지 오르는 데 십 초도 안 걸리게 해놓다니. 전기 기술자들은 이 부분에 대한 고려를 해야 한다.
23층도 2층과 똑같이 벽의 이면(二面)이 대형유리창이었다. 바닥은 니스칠을 한 짙은 색의 나무. 높은 천장에는 부분 할로겐 조명이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고 벽 한쪽은 나무 기둥을 나란히 박아 벽을 장식했다. 나무재질과 유리 금속으로 장식되어 도시적인 것과 네추럴함을 동시에 빚어내는 인테리어였다. 나무 복도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이 건물 피트니스 센터로 가는 입구야. 이 시간엔 사람이 별로 없지.”
건형이 설명했다. 대형 유리창 너머에 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8차선 대로였다. 유리창 발밑 아래를 내려다보며 건형이 말했다. 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위를 거의 쳐다보지 않을 걸. 건형은 낮게 속삭였다. 그리곤 유리벽과 회벽이 이어진 모서리 쪽으로 내 몸을 밀었다.
“두나야, 너 왜 이렇게 예뻐졌니? 너 보고 있으면 나 미칠 것 같아.”
건형은 천천히 입술을 댔다. 내 오른쪽 뺨이었다.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온몸에 스위치가 켜졌다. 온몸에 전자가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키스해본 것이 얼마만인가? 기억마저 까마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