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건형은 꽤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두었다. 삼성동 쪽은 내가 자주 차로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거리 쪽 코너에 이렇게 멋진 유럽식 레스토랑이 있는 줄은 몰랐다. 도심에 사는 소수의 특권층만을 위한 만찬의 공간 같았다.
외벽 전체를 대형 판유리로 해두고 있었다. 대로의 차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레스토랑 내부도 대형 판유리였다.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주방은 손님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은 발상이었다. 실내 장식은 환풍구 전선, 배관이 벽과 천장에 노출되어 있었다. 할로겐이 높은 천장에서 길게 꼬인 전선에 매달려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우아하게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통후추와 허브솔트로 양념이 알맞게 밴 피망과 브로콜리, 새송이버섯을 하나씩 집어 올렸다. 뒤죽박죽 섞여 맛을 망치지 않게 각각의 소스가 따로 제공되었다. 재료와 소스는 조화로웠다. 고유의 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먹을 때마다 혀끝이 행복한 철학자처럼 중얼거렸다. 삶은 아름다워~. 혀와 뇌세포가 행복에 겨워 떨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닭발 닭똥집 내장탕 곱창구이 뼈다귀감자탕의 교리(敎理)에서 충분히 변절자가 될 수 있을 듯했다. 예루살렘의 신성함을 거부하고 새롭게 출현한 종교에 열렬한 추종자가 된 듯 나는 스테이크를 썰어 오물거렸다. 오븐에 구워진 양념이 잘 밴 피망과 브로콜리, 토마토를 씹었다. 이 정도의 식욕이면 아마존 열대우림도 다 먹어치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여긴 우주선 안이란 걸 명심해야 해! 우주인들은 소량의 식사를 하지 않는가. 나는 나이프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도도한 패리스힐튼처럼. 헹커칲으로 입술 양쪽을 탁탁 한 번씩 닦는다. 그리곤 종이 파라솔이 꽂힌 딸기 칵테일을 양손으로 다소곳이 감싸 쥔다. 그윽한 눈빛으로 건형을 쳐다보면서.
건형은 건축소 사무실에서 설계하는 일들, 여기 저기 공사한 일들에 대하여 한참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응, 예술의 전당 앞에 있는 예술인의 집, 그것 우리 사무실에서 설계하고 시공한 거잖아.” “광화문 외교부 건물 뒤쪽에 있는 BK건물도 우리 사무실에서… 을지로에 있는… 역삼동에 있는… 상암동에 있는…” 건형은 신이 나서 서울 곳곳의 지명을 나열했다.
그러더니 우리나라의 지도를 활짝 펼쳐놓은 작전사령부의 사령관처럼 지휘봉을 지도의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그리고 있잖아, 수원에 있는… 용인에 있는… 대전에 있는… 대구에 있는…”
그러니까 건형은 서울 찍고 수원 찍고 용인 찍고 대전 찍고 대구 찍고… 전국을 다 찍고 다닐 판이었다. 나는 “으응, 그랬구나.” “어머 대단하다” “와우, 멋있는 걸?” “어머, 그 건물도?” 다양한 감탄사를 구사했지만 나의 수사법은 그 정도에서 바닥이 나고 있었다.
누가 그랬던가. 일에 열중하는 남자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건형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성실함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짜증이 나려 했다.
후식과 약간의 알코올을 섭취하자 건형은 비로소 섬세하고 지적인 전기를 나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약한 전류였지만 충분히 감전사가 일어날 만한 매력전인 전파였다.
“두나야, 내가 옛날에 너무 모질게 한 거 다 용서해줘.”
헤어지면서 나한테 선물한 거 다 돌려달라고 한 거? 모진 게 아니라 ‘쪼잔한’ 거였지.
“나 많이 반성했단 말이야.”
그래서 나랑 ‘쫑’ 내고 나와 가장 단짝이었던 친구와 바람났냐? 그리고 너희 둘 다 내 욕 무지하고 다닌 거 다 들었어. 방귀 함부로 뀌고 트림 함부로 하고 손톱 발톱 깎아서 모으는 이상한 얘라고…
“이제 내 인생의 시계침을 너한테 맞추고 싶어. 내 시계침이 항상 너에게로만 향해 있도록 말이야.”
그건 『연애, 노력한 만큼 성공한다』에서 제4부 <멋있게 프러포즈하는 방법> 두 번째 페이지 열 번째 줄에 나와 있는 구절이다. 건형은 아주 충실한 독자임에 틀림없다.
현대인들 삶의 모든 패턴은 편리하다. 모든 것이 매뉴얼화되어 있으니. 달라붙는 남자친구와 완벽하게 끊는 법, 기분 좋게 이혼하는 법, 이혼한 전 남편과 친구처럼 지내는 법…
건형의 말을 듣고 있으니 생각지도 않던 기억이 찾아왔다. 기억도 망각만큼 힘이 센 것이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악착같이 찾아온다. 그중에서 이런 기억도 있다.
건형이와 친구 승희와 셋이서 술을 마시던 때 일이다. 우리는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경기를 응원했다. 야구가 끝나고 나선 호프집에서 노가리를 뜯고 있었다. 롯데가 삼성을 이긴 날이었다. 9회말 역전 우승이었다. 롯데로서는 몇 년 만에 다시 정상고지를 탈환하는 날이기도 했다. 경기가 끝나자 그라운드로 뛰어나온 선수들과 감독은 얼싸안고 울었다. 우리도 함께 울었다. 6대 4. 기가 막힌 스코어였다.
우리는 모두 호프를 들이키며 노가리를 뜯었다. 모두 얼굴이 벌겋게 된 것은 야구경기에 대한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소변이 마려웠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일을 봤다. 그리곤 세면대 위의 거울을 봤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응원하느라 칠해놓은 붉고 푸른색 페인트가 땀과 눈물과 함께 얼룩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페인트를 천천히 지우며 롯데의 우승을 다시금 축하했다. 룰룰 콧노래를 부르며.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와보니 건형과 승희가 보이질 않았다. 호프집 안을 다 찾았다. 없다. 어떤 자리에도. 술값도 내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이에 굴할 성격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 성격은 쪼잔한 편이다. 나는 근처 술집, 카페, 커피 전문점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포장마차에 노래방, 당구장까지. 술값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종로 뒷골목 좁은 골목에 있는 이층 작은 카페였다. 테이블마다 나무 칸막이를 한 구석 자리. 건형과 승희가 있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키스를 하고 있었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서로의 입술을 다 먹어치울 정도로 둘 다 입술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입술을 핥는 소리가 쩝쩝하고 다 들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