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야, 이두나, 주상도 소장이 왜 그렇게 오버하냐? 니가 무슨 돼지 발정제라도 먹였냐?”
“무슨 말이야. 그럴 리가….” 나는 민진의 말에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세미나 시간에 네 편 못 들어서 난리냐고. 게거품 물고 말이야. 나중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계란프라이 딱 해먹어도 되겠더라… 무슨 일 있어?”
하긴 세미나 시간에 주상도 소장은 소장답지 않게 오버하는 듯했다. 술기운 때문에 나는 생수병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던 것이다. 태양계 행성 자기장 데이터 분석 발표였다. 이미 일주일 전 준비해둔 자료였다. 큰 착오가 없었다. 하지만 이구선이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맹아부가 덩달아 이죽거렸다. 나는 눈에 힘을 주어 책상 위 페이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주상도 소장이 나를 변호하며 나섰다. 이구나아가 독기 어린 혀를 길게 뻗자 다시 소장은 “마이 볼~”을 외치며 이구아나의 강한 스파이크를 받아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연구 발표라도 한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야… 일은 무슨….”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긴 이구아나가 널 족치지 못해서 난리지만….”
“…”
나는 다시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소장이 표 나게 나서는 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찌해볼 도리도 없었다.
“주상도 소장한테 관심 받고 싶어 난린데 여자 연구원들이 너 쳐다보는 눈빛이 장난 아니더라.” 민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내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홀짝였다. 헤이즐넛 향이었다.
“두나 선배, 민진 선배, 한 달 뒤에 정규직 승진 인사도 있고 계약직 재계약도 있다는데요?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현수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민진과 나는 컴퓨터 앞에 함께 앉아 있던 중이었다. 컴퓨터 화면엔 최근 인기 있는 레이싱걸의 섹시화보가 깔려 있었다. 야, 이거 전부 수술빨이야. 우리 같은 자연산은 어디에도 없다니까. 그러면서 D컵은 훨씬 넘는 레이싱걸의 터져 나올 것 같은 가슴을 탐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현수가 달려오자 민진이 재빠르게 화면 스크린을 껐다. 재빠른 순발력이었다.
“정규직 인사? 뭐 항상 돌아오는 거잖아. 벌써 인사의 계절이 돌아왔군.” 민진은 태평하게 말했다.
“어휴 이 비정규직 언제 면하나… 승진은 기대도 안 해. 잘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커피 잔을 홀짝이며 천장을 봤다.
“야, 우리 세대는 왜 이러냐. 늘 날씨가 나빴어. 국가 외환위기 땐 우리 아버지를 직장에서 자르더니 금융위기라고 우리를 자를 판이라니까. 무대 위로 불러놓고 의자 뺏기 놀이하는 것 같아….” 민진이 말했다.
정말 날씨가 나빴다. ‘피 튀기는’ 경쟁으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4년 내내 토플공부만 했다. 때마침 아버지 가구공장이 부도가 났다. 어학연수는 벌써 물 건너간 일이었다.
우리 가족은 연립주택 지하로 이사를 했다. 지하철 종착역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 가족과 의리를 지켜준 것은 강아지 봉이와 가구와 함께 따라온 바퀴벌레들뿐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선산이 보상을 받게 되어 몇 푼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래, 죽으란 법은 없지”라고 말하며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는 지하철역 근처 코너에 봉이 치킨집을 열었다. 치킨집은 웰빙을 구가하며 닭날개 돋힌 듯 치킨다리를 팔았다. (언니와 내가 닭발과 닭다리에 환장하게 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운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태풍처럼 ‘사스’가 날아왔다. 게걸스러운 식욕으로 그 많던 치킨을 날름 다 먹어버린 것이다.
나, 이두나의 인생도 변변찮았다. 잘 발라둔 창호지 새에서 찬바람이 늘 새어 들어왔다. 삶이 누수되는 느낌이랄까. 말하자면 계약직은 이런 것이다.
인생이란 여행에 짐을 꾸리는 데 항상 뭔가가 빠진 느낌 같은 것… 여행 때 필요한 것을 사러갔다 쇼핑목록 중 몇 개를 빠뜨리거나 지갑을 카운터에 놓고 오거나 버스 정류장에 아이를 두고 오거나 다시 찾아간 마트 주차장의 빽빽하게 서 있는 차들 사이에 주차하려고 주차장을 다섯 번이나 들락날락거리고 있는 느낌… 뭐 그런 거였다.
“야, 힘내, 우린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외환위기, 대구 지하철 폭발 사고에서도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가 아니냐고… 이 정도의 생존력이면 시멘트 속에 산 채로 매장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민진이 낄낄대며 넉살을 떨었다.
“선배들….” 현수다.
“내친 김에 우리 한잔 꺾으러 가죠.”
“아, 난 실례, 오늘 이 몸은 약속 있음….”
뭐야, 뭐야, 배신자야, 배신자에게 쓴맛을 보여주겠다. 민진과 현수가 눈 총알을 쏘아댔다. 미안, 미안하면서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울을 봤다.
눈은 좀 부었지만 이두나,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거야? 1온스에 1만 원짜리 아르마니 향수를 투자했다. 미용사에게 2시간과 5만 원을 지불해 커트와 드라이를 했다. 적어도 건형의 눈 하나와 뇌세포의 절반이 다른 이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면 달라진 나를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시세이도 뷰러로 속눈썹을 다시 집어올렸다. 오늘 버전은 펄이 들어간 스모키 화장… 그를 유혹할 수 있을까. 눈초리를 올리며 요염하게 눈을 떠보았다. 김혜수처럼. 술기운으로 눈이 잔뜩 부은 김혜수였다.
마음속의 단면을 잘라본다. 그러면 서로 다른 시간의 기억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건형이 보내는 문자와 전화를 받으면 기억의 층 속에 묻혀 있던 것들이 하나씩 옷을 벗었다.
소파에서 비스듬히 누워 같이 듣던 케니지 색소폰 연주, 카페 기둥 뒤에서 키스하려다 주스를 엎지른 일, 건형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만들어 먹던 상하이 파스타, 입가에 묻은 파스타 소스를 손등으로 살살 닦아주던 일까지.
건형을 생각했다. 음.
그러니까… 브라에서 뽕은 재빨리 빼두어야 한다. 뽕이 탄로 나면 안 되니까. 검은 망사 팬티와 망사 브라를 준비했다. 세일가로 자그마치 30만 원이나 하는 거금이었다. 나는 속옷의 모든 과정을 다시 점검하고 점검했다. 우주로 우주선을 발사하기 전 우주선의 모든 부속을 다시 점검하는 우주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