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호프집에 들어오자 우리는 마치 결사대 같았다. 이구선과 맹아부를 비롯하여. 목숨을 걸고 나치 치하에서 탈출하는 걸 성공했거나 죽을병에 걸렸다가 기적의 치유법으로 회복된 사람 같았다. 해방감이 몰려들었다.
“지구를 살려야 한다는 친절한 생각을 먹고 싶지 않아. 난 소시지를 먹고 싶을 뿐이야.” 민진은 낄낄대며 포크를 삼지창처럼 들었다. 우리는 열광적으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처럼 젓가락을 휘둘러댔다.
“두나 선배, 이렇게 멋있는데 왜 아직 결혼을….” 균이었다.
“그런 말 하도 많이 들어서 지겨운데?” 콧방귀를 뀌는 이두나, 나는 아까부터 반짝거리는 이구선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다. 그녀가 바른 립스틱의 브랜드와 호수가 궁금했다.
“야야, 걱정하지 마. 이두나의 쾌활함, 재치, 교양, 지성에 정복당한 남자 있으니까….” 서둘러 말을 잇는 민진,
“어어, 있구나. 애인….” 급하게 입가의 호프 거품을 닦는 균,
“왜 굳이 결혼을 하려 해? 섹스만 하면 되지.” 혀가 고부라지는 이구선,
참고로 이구선의 남편은 잘나가는 성형외과의사다. 그는 그의 아내를 실험용으로 맘껏 활용했다. 이구선의 양쪽 가슴에 300cc의 보형액과 콧등에 3그램의 실리콘, 자궁에 영구피임도구가 자리하고 있다. 입 속에 임플란트까지 하면 그녀는 완벽한 사이보그다.
“전세계 여성들에게 왜 섹스를 하냐고 설문 조사한 적 있어….” 대화의 기선을 잡는 민진. 식욕이 채워지니 육체적 욕망이 화두를 잡기 시작한다.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해.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 물론 당연히 그게 첫 번째 이유일거예요.” 눈을 반짝이는 린, 최근에 들어온 신참 연구원. 호기심이 가득해 얼굴 전체를 잡아먹고 있다. 린은 프라다 최근 신상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자본주의가 항상 악마 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기 위해….” 이구선이 몸을 꼬며 말했다.
“애인이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기 위해?” 린의 말에 민진이 빙고!를 외쳤다.
“이런 이유도 있을 것 같아… 파트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두나의 말,
“캭,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린이 말했다. 균과 현수는 빙글빙글 웃기만 한다.
“별 희한한 이유들도 많아. 상대방에게 성병을 옮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남성이 불쌍해서. 파트너가 졸라서, 승진을 위해, 거절하는 방법을 몰라서, 핸드백을 사기 위해, 차를 사기 위해, 편두통 치료를 위해, 운동 삼아, 자궁 내막을 예방하기 위해, 섹스한 지가 너무 오래돼서, 성적 테크닉을 증진하기 위해, 어떤 조직에 가입하기 위해… 등등” 민진이 아주 빨리 말했기 때문에 무슨 영어 단어를 외는 것 같았다.
“내가 대학 다닐 땐 친구들보다 성관계 횟수를 많이 늘리기 위해 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린은 대화에 완전 몰입했다.
모두 상상으로 섹스를 하고 있었다. 섹스는 상상적인 것에 속해 있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것은 차라리 상상과 이미지로서 존재했다. 섹스는 상상적으로 더 격렬하고 더 멋있고 더 허무했다. 정념적인 것들이 다 그러하듯. 질투와 고뇌와 소유와 욕망이 마음속에서 더 불타오르 듯 말이다. 우리는 모두 마법에 걸린 듯 미친 듯 섹스에 대한 이야기에 몰두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더 격렬한 섹스 같았다. 말을 하는 것으로 실제보다 더 격렬해지는 이야기. 즉 도취에 빠진 것이다. 나는 건형이 교접 후 내 검은 머리카락에 정액을 뿌려주길 상상 속에서 원하지 않았던가. 그러자 번개처럼 건형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섹스는 잠자지 않으면서 잠 안에 있는 듯한 도취지. 덧없는 삶을 계속하게 하는 완전한 결합이고. 아침 식탁 위 시리얼처럼 깔끔한 식사야.’
그렇다. 섹스는 상상 속에서 더 강렬한 접촉이다. 그러면서 허무를 잊게도 하고 또다른 허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섹스 상상, 그건 생에 대한 순수하고 착한 소비인 것이다.
“여성들은 가짜로 흥분하는 척하기도 한다면서요….” 현수의 리시브,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지. 뭐, 남성들의 정복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거야. 자신의 오르가슴은 무시한 채… 그래서 평생 오르가슴을 모르고 산 할머니도 많아. 무덤가서 알려나….” 민진의 말에 린과 나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까 남성들이 더 불쌍해요. 몸의 욕망을 도저히 어쩌지 못 하니까….” 현수가 대꾸했다. 그래서 그날 우리는 불쌍한 남성을 위해 건배했다. 순수한 몸 욕망을 위한 건배, 인류의 평화를 위한 건배를…
했는데, 그 이후엔 기억이 별로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 순간 차마 내 얼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은 잔뜩 부어 있었다. 눈은 풀려 힘이 없었다. 입안이 모래를 씹은 듯 까끌까끌했다. 입가 종기는 빨갛게 익어 있었다. 영 말이 아니었다. 목매달고 싶은 심정이었다.
건형이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키스라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종기가 터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짜기엔 종기는 아직 충분히 숙성되지 않았다. 고름이 가득 찬 종기를 코밑에 매달고 검은 망사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숨이 났다.
어제 어떻게 된 거야? 현관문을 열었던 기억이 난다. 나를 반긴 것은 형두와 한나 언니의 비명소리였다. 물론 그들은 나를 향해 비명을 질러댔다. 내 머리카락에 막걸리가 묻어 허옇게 되고 구두 한쪽 굽이 떨어져나가 절룩거리고 초록 가죽 재킷에 시큼하게 토한 흔적이 묻어 있었다.
“너, 도대체 이 밤중에 어떻게 하고 다닌 거니?”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히죽히죽 웃었다. 술 취하면 자주 나타나는 현상.
“주상도란 사람한테 전화 왔었어. 당신 동생 단속 잘 시키라고… 이렇게 늦은 밤에도 들어오지 않는 거 행동거지가 문란해서 그렇다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 한나 언니는 입을 실룩거리며 소리를 쳤다.
“무~슨 말이야… 소장~님이 왜?” 나는 꼬부라진 혀로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인데? 너희 연구소 소장이라면서….” 눈을 사납게 뜨는 형두,
“그래 마아~자….” 말이 늘어지는 이두나,
“근데 왜 그 사람이 집까지 전화해서 동생 단속 잘하라는 둥… 왜 그딴 말을 하게 하니? 응? 네가 젊은 남자들 하고 술 마시고 천박하게 놀았다며?” 한나 언니 목에 핏발이 선다.
“뭐? 그 정도 갖고 그래. 젊은 남자 후배와 술도 못 마시나? 질투가 하늘을 찌르는군.”
그러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방으로 와서 꼬꾸라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