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식욕으로 가득 찼다. 모두 위장이 그르렁대고 있었다.
“나는 먼저 햄버거를 먹을 거야. 참깨를 잔뜩 뿌린 대형 버거로 말이야.” 민진이 말하자
“나는 찹쌀 순대와 구멍이 뻥뻥 뚫린 뻘건 허파를 먹고 싶어….” 내가 말했다. 매머드의 생 갈비뼈를 입에 넣어 입가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원시인처럼.
“자장면과 군만두 먹고 싶어….” 남현수가 말하자,
“오렌지주스에 치즈샌드위치 먹고 싶어 죽겠어….” 고상과 도도가 고상을 떨었다.
전기 소켓 안에 서로 다른 취향과 메뉴들이 연결되어 있지만 플러그는 모두 하나의 소켓에 모여 있었다. 그것은 밥이 먹, 고, 싶, 다였다.
동서울터미널 근처 들어갈 만한 음식점이 딱히 눈에 띄진 않았다. 하지만 모두 식당 입간판이라도 뜯어먹을 얼굴이었다. 연구원들이 고른 곳은 햄버거도 순대도 자장면도 치즈샌드위치도 아닌 고깃집이었다. ‘백제고기집’으로 들어갔다.
고기 굽는 냄새가 연구원들의 혀와 위장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화덕이 오르고 고기가 구워지기 시작했다. 모두 장작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매머드의 갈비를 씹던 동굴 거주 시대의 인류로 돌아갔다. 화덕의 불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풀을 뜯던 것으로 단련된 턱이 열심히 고기를 씹었다.
이제 그들은 고기를 굽고 씹으며 그날 있었던 사냥에서의 무용담을 나눌 차례였다.
정말 대단한 사냥이었어. 집채만 한 매머드를 에워싸고 창으로 매머드의 목을 찌르던 용맹함 따위에 대한 이야기…
“소장님, 풀 정말 잘 뜯으시던데요. 생식이 체질이신가 봐요….” “그래서 그렇게 건강하시군요. 얼굴이 십 년은 젊어….” “어디 가시면 늙은 대학원생이라 하겠습….” “늙은 대학원생이라뇨. 그냥 대학원생….” “맞습니….” 채 무용담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무용담이,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다시 다른 무용담이 앞의 말을 잘라먹었다. 풀을 뜯던 만큼 빠른 입담이었다.
“두나 선배님, 생식 체험 처음이시죠? 그런데도 역겨워하지 않고 잘하시던데요?”
석사졸업하고 최근에 들어온 비정규직 균이었다. 이십대 후반, 귀밑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보였다. 보송보송한 나이. 같은 전기학과 출신이었다.
우리는 생식과 연관하여 지구 온난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기나 가스를 줄이기 위해 빨랫줄을 사용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빨랫줄은 목을 매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태양과 풍력에 의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말까지 했다. 빨랫줄은 위대했다. 지구 온난화, 산성비, 핵폐기물, 환경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주상도가 입구 쪽 테이블에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내 얼굴 세부, 이를테면 이마나 어깨 볼이나 목을 강렬하게 비추고 있었다.
눈길을 피하진 않았다. 나는 더 웃고 떠들었다.
균과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해 건배했다. 생식을 위해 건배했다. 세계인구 적정선에 기여하는 콘돔을 위해 건배할 때 쯤 민진도 합세했다. 어깨동무까진 안 했지만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한 결사대가 만들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였다. 문자였다. 주상도가 날린. 그는 저격수처럼 과녁을 겨냥하다 드디어 총알을 날렸다. [젊은 남자 후배와는 적절한 거리가… 이곳은 공적인 자립니다]
나는 문자를 씹었다. 풀을 씹던 왕성한 아구력으로…
다시 문자였다. 주상도의 재투구.
보낸 문자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문자를 씹었다. 이번엔 고기를 씹던 턱의 힘으로…
균과 민진이 깔깔댔다. 뭔지 몰랐지만 나도 합세해서 깔깔댔다.
고깃집 천장엔 고기 굽는 연기만 피어오른 게 아니었다. 전파들이 분출되고 있었다. 주상도로부터 오는 전파들. 전파 입자들을 막아내는 나의 방어력. 나는 구리 절연체처럼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강력한 전파의 착지를 막아냈다.
고깃집을 나왔다. 알코올은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만들어주었다.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 안에 잠재된 수많은 삶의 조각 중 일부였다. 숨겨져 있던 욕망, 슬픔, 꿈 그런 류의 불길들…
드디어 시간이 왔다. 화덕에서 매머드의 갈비를 뜯던 최초의 인류가 뼈다귀를 두들기며 화덕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시간. 노래방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이대팔 넘버원을 모시고 투와 쓰리가 노래방으로 사라졌다. 남은 똘마니들은 자기 구역 보스의 얼굴을 살폈다. 손진영 과장이 대취하여 택시를 타고 자신의 동굴 쪽으로 사라지자 우리 과 연구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주상도 소장은 일찌감치 집으로 간다고 이미 휭 하니 가고 난 뒤였다.
강남 쪽 클럽으로 택시를 몰았다. 이구선과 맹아부가 택시를 타고 뒤쫓아 왔다. 홍대 어느 클럽에 내리자 이구선의 발에는 구두가 벗겨지고 없었다. 어어, 내 구두가… 그러는데 맹아부가 여기, 하고 구두를 내놓았다. 선물로 받은 티켓으로 세일 때를 기다려 샀을 법한 무광택 금강제화 구두였다. 이구선은 술이 취하면 모든 곳이 안방이라 생각했다. 아무 곳에나 구두를 벗고 옷을 벗었다.
사이키 조명이 번쩍이는 클럽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우리는 모두 7명이었다. 이구선과 맹아부를 떼어놓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다시 알코올로 몸을 소독하기로 했다.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