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버스가 출발했다. 연구 1과 과장이 마이크를 쥐었다. 연구원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다 조용해졌다. 이대팔의 말은 언제나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다만 그 모든 말은 지시나 자기과시란 것 뿐. 이대팔이 일어나서 흠흠… 하고 말을 이어가자 이구선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맹아부가 간간이 박수를 쳤다. 다른 이들도 함께 동참했다. 이대팔은 신이 났는지 계속 뭔가를 떠들었다. 나머지는 이대팔의 말을 들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졸리기 때문이었다. 나른하고 무기력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렸다. 이천 휴게소였다. 사람들이 모두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 민진에게 아메리카노를 부탁했다. 민진은 나무벤치에 아메리카노를 양손에 들고 앉아 있었다. “역시 여행은 휴게소에서 마시는 이 커피 맛이란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곤 커피를 홀짝였다.
“야, 선배들, 여기 있었네요.” 남현수가 벤치 쪽으로 뛰어왔다.
현수를 보려 고개를 들다 주상도 소장과 눈이 마주쳤다. 소장은 다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잠시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어떤 알지 못하는 전류가 흐르는 눈빛.
하긴 주상도 소장은 그 전에 있던 직장상사와는 확연히 다르다.
어떤 상사는 점심 먹으러 가면서 내 손에 자기 집 공과금 명세서를 쥐어주곤 했다. 점심시간에 은행 한번 다녀오면 그날 점심은 땡치고 만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휴일 날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해서 가보면 어김없이 이삿날이다. 하루 종일 자장면 한 그릇 먹고 이삿짐을 나른다. 애초부터 ‘시다바리’로 생각했다.
해외 출장 간 길에서 얻은 아이디어 기획안을 진부하다고 비난하더니 어느 날 자기 것인양 이름만 바꿔 소장한테 올린 과장도 있었다. 굳이 이대팔 과장이라고 이름은 밝힐 순 없지만… 나는 언성을 높여 따졌다. 이대팔은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 하며 비열하게 웃었다. 정말 얼굴에 하이킥을 날리고 싶었다. 최악의 경우도 있다. 어떤 상사는 공무원 고위직을 모시는 술자리에 나와 다른 여자연구원을 불러내기도 했다. 일종의 ‘기생’역이었다. 술을 따르고 웃어주는 일. 노래방까지 따라가면 도우미가 따로 필요 없었다. 기억할 만한 굴욕감이었다.
주상도 소장은 적어도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부하직원을 괴롭히진 않았다. 공과 사가 분명해보였다. 수재는 열등감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진 않으니까.
그는 여자 연구원들에게 함부로 커피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연구원들의 일상사에 관심과 애정이 있었지만 배려를 위한 것이었다. 실험 보고서나 프로젝트 보고서에 단 한번도 날짜를 어긴 적이 없었다. 데이터 프로그램을 건성으로 돌린 적도 없었다. 기존 연구 보고서 자료에 대한 기억력도 비상했다. 세세한 것까지 꼼꼼하게 자료들을 찾아냈다. 책상 위는 전화기와 메모지만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연구실은 완벽할 만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두나는 도도하게 눈길을 아래로 깔았다. 다소곳하게 커피를 마셨다. 오늘의 연기는 최대한 자연스러움이 관건이다. 나는 우아하게 민진의 소매를 끌었다. 버스에 올랐다.
생식 체험장은 봉평에 있는 작은 캠프였다. 1박 2일 코스. 가장 짧은 코스. 버스가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었다. 캠프 안내원이 연구소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일종의 오리엔테이션 겸 강연이었다.
안내원의 강연은 진지하고 지루했다. 대개 환경주의자들이 그러하듯.
환경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한 강연이었다. 우선 자전거라 했다.
“자전거는 경제적이고 건강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는 이동 수단입니다. 자동차와 같이 화석연료를 쓰지 않기 때문에 비를 산성화시키거나 일산화탄소를 내뿜지도 않지요. 교통 혼잡을 일으키지도 않고 막대한 정부 예산을 들여 도로를 내고 포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발전기용 자전거지만 나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있다. 전기 자전거.
그리고 다음은 콘돔…. 응? 콘돔? 강연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하룻밤에 1억 번의 성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하룻밤에 최소한 35만 명이 상대방에게서 성병이 옮고, 1백만 명의 여성이 임신을 하는데, 그중 반은 원치 않은 임신이라네요. 콘돔은 성병과 원치 않은 임신을 막아줍니다. 환경, 식량,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 인구를 지구가 부양할 수 있는 적정 수준으로 억제해야 합니다. 바로 이 엄청난 일을 하찮게 보이는 물건인 콘돔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연구소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곤 조금씩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들은 지구 환경운동에 기여하고 있는 충실한 실천자인지 모른다.
강연장을 나오니 공기가 상쾌했다. 시골 캠프장이었다. 캠프장 너머에 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초원에는 햇빛이 충만했다. 풀만 먹어 배는 고프겠지만 기껏 1박 2일. 몸도 건강해지고 지구도 깨끗해진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가볍게 길을 걸었다. 30명 정도의 연구원들이었다.
생식 가이드는 햇볕이 내려 쪼이는 풀밭 위에 멈췄다. 풀 사이로 바람 한 줄기 불지 않았다. 햇빛만이 가득했다. 가이드는 차양용 플라스틱 챙을 얼굴 앞면으로 당겼다. 초록색 반투명 플라스틱 챙이었다. 그는 풀 하나를 가리키며
“이건 토끼풀인데 먹어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손으로 풀을 힘껏 뜯었다. 자, 이렇게 먹는 겁니다, 하더니 먼지와 흙을 손으로 털어내고 냠냠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