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하긴, 뭐, 그렇다. 저렇게 멋진 눈매와 알맞은 근육을 지닌 남자를 만나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는 MIT 수재에다 넘치는 매너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연구소 직원 중에서 나를 택했다. 간택했다. 이건 분명 희열에 가깝다. 짜릿한 경이로움일 수도 있다. “소장님, 그냥 친한 관계라 하셨죠. 직장 상사시니까 최대한 예의를 다해 대하겠습니다. 직장상사와 부하 직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무심한 소금과 설탕처럼 사무적이려고 애썼다.
“아, 아, 알았어요. 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주상도 소장은 민망한 듯 한참을 웃었다. 위 치아가 예뻤다. 그리곤 자신이 과거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야기, 생성광학 연구소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 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적어도 옛날에 자기를 좋아해 따라다니는 여자들이 많았다는 허풍 따위는 떨지 않았다. 품위와 위엄과 절제가 있었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밖에는 보이는 법이 없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렇다. 우리는 타인들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는 추리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 주상도 소장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수재의 다른 쪽 면에 어쩌면 인간적 외로움과 연민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위엄과 품위와 따뜻함을 지닌 수재도 폭풍우가 치면 엄마? 하고 울 수도 있고 기념일날 천 마리 학을 유리병에 담는 천진한 낭만을 지닐 수도 있다.
그가 내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듯하다.
완전 나한테 빠진 건가?
연구소 떡갈나무 잎이 빨갛게 윤이 난다. 단풍이 지고 있다. 생명의 절정이었다.
가을이면 연구소는 단합대회 겸 야유회를 간다. 매년 하는 행사였다. 야유회는 강원도로 간다고 했다. 이번 야유회의 테마는 웰빙. 최근의 트랜드다. 야유회 테마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했다. 문화답사, 웰빙, 예술체험, 맛집 기행, 오지탐험, 온천기행. 그중에서 고른 것이 웰빙이었다.
연구원들 중 비정규직의 숫자는 정규직보다 세 배가 많다. 비정규직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여자 연구원들은 모두 웰빙, 그중에서 다이어트에 목숨 걸고 있었다. 이를테면 목숨을 다해 이 생명을 다해 이 세상 끝날까지 정말 다이어트를 하고 싶어 했다.
한번은 연구2과 연구원이 다이어트에 기적적으로 성공하여 연구소에 나타났다. 지질학 전공자였다. 그 지질학은 직모 단발에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얼굴피부는 완전 화산폭발 직전이라 성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몸매만은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연구원들은 그 지질학을 보며 지진이 날듯 환호성을 질렀다. 먹고 싶은 것을 거절하면서 두세 달이나 참았다니. 마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고문을 견디는 독립투사나 수양을 위해 금식하는 승려만큼 위대해보였다.
그 지질학 때문인지 뭔지 연구원들은 야유회 테마를 웰빙으로 잡았다. 웰빙 중에서도 좀더 색다른 웰빙. 이름 하여 생식체험이었다. 생식체험을 적극적으로 추천한 사람은 민진이었다.
“우리가 육류 섭취량을 조금만 줄여도 지구는 한층 더 깨끗해질 수 있다구. 소, 돼지, 양, 염소, 얘네들이 먹는 곡물과 콩으로도 세계 기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어. 가축들이 마시는 물은 어떻고. 소들이 마시는 물, 소들이 먹는 곡물만 절약해도 지구의 기아와 물 부족은 사라질걸.”
“그 뿐이야? 대기 오염의 주범을 자동차 배기가스로 알고 있지? 그건 오해야. 소가 일 년 동안 뀌는 방귀는 자동차 배기가스보다 열 배가 많아. 온실기체인 메탄가스 말이야. 대기 오염과 지구온난화의 주범이지. 그런데 지금도 목장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삼림을 벌채하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연구소 직원들은 최소한 하루 동안 채식주의, 그것도 생식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채식과 생식 습관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구소 연구원들도 약간은 들떠 있었다. 유행은 한번 정도 따라해 봐야 직성이 풀리기도 하니까.
나는 야유회라곤 하지만 며칠 전부터 여행준비 공포증에 시달렸다. 첫날 버스를 탈 때 청바지를 입을지 뭘 입을지, 여행가방에는 셔츠를 하나 더 넣을지 말지, 구겨지지 않는 것으로 짧은 드레스 한 벌 정도는 더 넣을지 말지에 대하여 고민했다. 심지어 잠잘 때 세수를 하고 나서 눈썹을 꼭 그려야 한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야유회가 들뜨기보다 성가셔졌다.
고민 끝에 내가 입고 나타난 것은 가죽 재킷, 미니 진스커트, 같은 컬러의 스키니였다. 이정도 옷발이어야 ‘연구소의 스타일리쉬’란 명성을 이어갈 듯했다.
민진은 대절버스 옆자리에 앉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야, 너 깜빡 잊고 치마를 집에 벗어두고 온 거 아니야?” 민진이 까불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