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지? 설마 무슨 이성적 관심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처음 두나 씨를 보았을 때 마치 제가 열일곱 살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이 뛰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뭐 이렇게 시작하는 뻔한 말들 말이다. 남자들은 고백의 버전 한번 바꾸는 법이 없다니까.
“네? 말씀해보시죠.”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주상도 소장을 쳐다봤다.
“이두나 씨도 빨리 정규직으로 자리를 잡아야하지 않겠어요? 이두나 씨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알긴 아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건 그렇지만….”
순간 앗! 실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처세적 겸손이 충분히 학습되지 않은 탓이었다. 나는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제가 능력 있다는 게 아니구요. 정규직 잡기가 워낙 힘든 일이라서….”
“물론 어렵다는 거 알죠. 하지만 노력은 해봐야죠. 이번 가을에 내가 알고 있는 연구소에서 전임 자리를 뽑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생성광학 연구소라고….”
생성광학 연구소라면 정부산하 프로젝트만 몇 개씩 하고 있는 연구소다. 재정 튼튼하고 쟁쟁한 실력자들이 있는 연구소. “예?” 나는 주상도 소장의 얼굴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다시 쳐다봤다. 아무래도 그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이두나 씨는 근데… 참 매력적인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려다 말았다.
물론 내가 매력적이긴 했다. 대학 때 공대 여학생의 파워를 보여주기 위해 체육대회 치어걸을 할 때였다. 팔랑거리는 핫미니를 입은 나를 보고 남학생들의 놀라는 표정들이란. 물론 사냥에서 갓 잡은 멧돼지의 허벅지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놈, 나를 사랑했던 남자, 흐지부지 끝난 사람, 내가 어른이 되기 위해 같이 지낸 괜찮은 남자…. 갑자기 과거의 남자들이 떠올랐다. 과거의 남자들을 하나씩 떠올리다보니 아흔 살 노파가 된 느낌이었다.
“저 오랫동안 두나 씨 지켜봤어요.”
“….”
“가끔씩 두나 씨 따로 만나면 안 될까요?”
주상도는 부드러운 위엄을 지닌 채 나를 쳐다봤다. 손끝에 약한 전류가 통하는 듯 찌릿한 느낌이 왔다. 나는 그의 말에 무관심한 척했다. 농어를 열심히 포크로 집어올렸다. 타르타르 소스를 듬뿍 묻힌 채. 나는 도도한 여자였다.
“저, 두나 씨가 원한다면….”
물론, 좋아요, 라고 말할 줄 알았겠지? 그러나 직장 내 사내 커플은 근친상간이다. 가장 금기시해야 할 요소다. 상관과의 애정관계는 더욱 더.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것도 권력적 종속 관계로 전락할 게 뻔했다.
대학 때 동기 중엔 복종에 대한 판타지에 시달리는 애가 있었다. 연두라는 화학과 애였다. “건장한 남자에게 나를 완전히 내던지고 싶어. 나를 돌봐주고 애지중지 아껴주고 헝클어뜨리는 그런 남자를 말이야….”
하하지만, 나는 별로다. 누군가에게 귀속되는 것은 주머니 속 쥐처럼 자아를 구부려 누군가의 함 속으로 들어가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고 당장 뾰족하게 얼굴을 들이대며 싫다고 말하기도 힘든 지경이다. 나는 데이트 신청에 괜히 바쁜 척하거나 스물다섯 살 생일에 죽어야지 생각하는 대책 없는 이십대가 아니다. 주상도는 에너지 연구 학계와 연구소 쪽 인맥의 상당 부분을 주무르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우리 연구소 소장이다. 연구소에서든 편집회의에서든 심지어 구내식당에서든 얼굴을 부딪친다. 사회관계학상 정신분석학상 여러 가지로 복잡한 간단치 않은 문제들이 삼십대 비정규직 싱글녀가 처한 역사적 현장이었다.
나는 농어스테이크를 바라보았다. 입을 오므리고 가만히 있었다. 오늘 바른 샤넬 립글로스가 스테이크 소스와 함께 입속으로 다 사라지고 없었다.
“하긴, 두나 씨처럼 매력 있는 사람에게 남자친구는 당연히 있겠죠? 있다면, 좋습니다. 제가 당연히 물러나죠.”
남자친구? 며칠 전 남산에서 만난 건형을 떠올렸다. 삼년 만에 처음 만난 옛 애인을 남친이라고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도, 옛날에 차였지만 지금은 다시 한번 시작해보려구요,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열렬하게 연애하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뻥’을 쳐대면 주상도는 연구소에 다 소문을 낼 게 뻔했다. 그렇다고 남자친구가 없다고 하면 주상도 소장은 “나이스….” 하면서 몇 톤짜리 트럭을 세우고 쿵 하고 내 앞에 제 감정의 짐을 마구 부려놓을 게 뻔했다. 윽, 선택은 잔인했다. 신은 가혹했다.
“잘, 잘 모르겠어요. 소장님, 저는 직장 내에서 어떤 사적 관계를 만들기는 좀… 부담이….”
“아니ㅡ 두나 씨, 사적 관계라기보다는 그냥 좀 친하게 지내자는 것이죠.”
주상도 소장은 마치 내가 자신의 호의를 수락이라도 한 것처럼 관계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그럼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 것에 한 표! 던진 거로 알겠습니다.”라고 제멋대로 말하곤 껄껄거렸다.
휴…. 저렇게 멋대로 추측하고 단정 짓고 결론내리는 거 다 테스토스테론 때문이다. 한번 축구선수들이 운동장에 들어서면 심장 박동수와 테스토스테론이 20% 증가하는 것처럼. 한번 여자에게 들이밀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는 걸까. Y염색체의 소유자들은 정말 문제가 많다니까.
주상도의 미끄러지듯 흐르는 눈빛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