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인터뷰 건에 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카드할부금 걱정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저, 저, 글쎄… 했던 것 같은데 얼떨결에 약속이 정해져버렸다. 주상도 소장은 그럼, 그곳에서…라고 몇 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고 보니 이상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상도 소장이 왜 나를 사적으로 만나자는 걸까?
영화 보러가자는 민진에게도 평소 때와 달리 거짓말을 했다. 남자 만나는 일에 관한 한 민진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만의 비밀 하나쯤 만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으니까.
콜택시를 탔다. 레스토랑은 저수지 쪽에 있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저수지는 가까이 갈 수도 없을 만큼 악취를 풍겼다. 지자체 예산이 들어오고 환경정화라는 명목으로 못 바닥 안에 있던 쓰레기를 다 들어내는 큰 공사를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저수지는 그대로 매몰되거나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수지가 맑은 얼굴로 햇빛을 받아내자 이곳저곳에 낚시꾼들이 나타났다. 연인들이 차를 몰고 나타나고 곧이어 모텔과 음식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저수지 풍경은 유럽의 자연 풍광이 담긴 멋진 달력 속 그림 같아 보였다. 밤은 향기로 물들어 있었다. 택시는 어느새 저수지를 끼고 좁은 밤 도로를 달렸다.
나는 처음으로 주상도 소장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연구 분야 수재, 깍듯한 예의와 매너, 다비드상을 닮은 듯한 귀티 나는 얼굴, 딱 뻗은 어깨와 군살 없는 몸매, 부하 연구원들의 생일까지 기억하는 자상한 관심, 회의를 주재할 때 간간히 섞는 유머와 위트, 통찰력 넘치는 의견수렴, 가끔 카리스마 넘치는 위엄까지. 연구소는 새로 온 이 연구소장에 대한 관심으로 수군거리곤 했다. 여자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미혼이라는 둥 돌아온 싱글이라는 둥 관심이 많다. 그의 법적인 미혼, 기혼 여부에 대한 관심부터가 인간계보에 대한 탐구 시작이었다.
주상도 소장은 전에 있던 소장처럼 회식 자리에서 음탕한 이야기를 즐기지도 않았다. 싱글녀들에게 애인하고는 일주일에 몇 번씩 하나? 따위의 촌스럽고 모욕적인 농담도 하지 않았다. 연구원들의 약점을 가지고 빈정대거나 야유하지도 않았다. 그 전에 있던 소장은 연구원 중 하나가 조그만 실수라도 하면 교정을 보다 오타나 오문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했다. 조롱과 질책을 즐겼다. 그 덕에 연구원들은 안면경련이나 위경련을 얻었다. 한마디로 ‘머저리’거나 ‘왕짜증’이었다.
주상도 소장이 연구소에 나타나자 외딴 산장에 벽난로 하나가 들어온 느낌이었다. 사소한 웃음이 늘었다. 티타임이 늘었다. 사람들이 뚝배기 해장국을 먹다 애플 소스가 곁들인 스테이크를 먹는 듯 우아해졌다.
특히 그는 여자연구원들의 내면을 흔들었다. 이태리제 수제 구두를 신었거나 수제 정장을 입지 않았어도 그는 충분히 멋있었다. 샐러드에 어떤 소스를, 고기는 어느 정도, 디저트는 무엇으로, 를 묻는 서비스 좋은 서빙 같았다.
저수지 쪽은 저녁 빛에 제 몸을 완전히 맡기고 있었다. 포플러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저수지 물 표면은 주변 식당과 카페의 불빛으로 어른거렸다. 물빛과 불빛이 섞이자 저수지는 나직하고 은밀한 유혹자처럼 눈을 반짝였다.
주상도 소장이 안내한 레스토랑은 새로 생긴 이태리언 레스토랑이었다. <물고기 눈>. 유럽식 회벽칠을 하고 흰 창틀 여닫이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창밖 저수지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배치해서 ‘물고기 눈’이었다. 실내에는 핀란드산 짙은 원목바닥이 깔려 있었다. 웨스턴 풍 원목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 할로겐이 같은 간격으로 매달려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랜 고행과 금식에서 돌아온 수도승처럼.
‘와~ 이런 분위기… 얼마만인가….’
나는 눈동자를 굴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최대한 주변을 살폈다. 한 곳만을 응시하는 듯하는 자세가 폼의 기본이었다. 자칫 시선을 돌리다 다른 이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절대로 안 된다. 누군가의 시선을 즐길 줄 아는 무심한 듯한 자만의 에고가 여성에게는 필살기인 법.
주상도 소장이 화장실에 손을 씻고 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코스 쪽 페이지를 넘겼다. 생각보다 비싼 집이었다. 이 돈이면 닭갈비, 닭발, 돼지족발 몇 인분은 먹겠군.
주상도 소장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나는 재빨리 메뉴판을 제자리에 놓았다. 도도하게 천천히 재킷을 벗었다. 텍을 떼인 바나나 리퍼블릭이었다.
그가 시킨 식사가 나왔다. 큼직한 유리그릇에 황금빛 올리브유로 버무린 샐러드와 호밀빵… 이어 살짝 조리한 참치와 오븐에 구운 채소가 나왔다. 검고 오묘한 가지와 붉은 피망이었다. 음식의 구성 요소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원색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처럼 대담해보였다.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목을 길게 뽑았다. 18세기 살롱의 귀부인처럼. 마늘기름향이 나는 가지와 피망을 포크로 집었다. 최대한 입을 작게 오물거리며 씹었다. 티슈로 양 입가를 교양 있게 톡톡, 찍으면서. 연어 카르파초와 농어가 나오자 나는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어 카르파초와 타르타르 소스를 곁들인 농어 요리에 대한 해설이었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입맛과 펜에서 나온 말들. 주간지 <오늘의 요리>에 나오는 요리평론가의 말이긴 했지만… 쩝.
“저, 이두나 씨… 이런 말 꺼내기가 좀 그렇지만….”
주상도는 생글거리는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뭔가 진지해지려는 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