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사랑이란 감정이 워낙 성급하고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욕망이기 때문일까. 이 욕망을 합법적으로 관리하고 자연스럽게 해소하게 하려고 결혼이란 형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욕망은 거품 빠진 맥주처럼 한심한 것이 되고 만다. 발톱이 발가락 위에 놓여 있을 때 네일아트해가며 예뻐 죽으려하다 일단 깎고 나면 쓰레기가 되는 것처럼.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좋아하다 욕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면 짜증이 나는 것처럼. 그런 것일까?
왠지 힘이 빠진다.
일단 가족이란 동맹이 결성되면 욕망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셈이다. 애라도 하나 낳게 되면 상황은 더 급진전된다. 애 방에 들릴까봐 부부관계도 입 틀어막고 해야 하니까.
형두와 한나 언니는 나 때문에 밤만 되면 안방 텔레비전 소리를 더 크게 트는지도 모른다. 신음소리를 죽이기 위해서 서로의 입을 틀어막고 최대한 몸놀림을 작고 빠르게 하면서 섹스를 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2배속으로 해서 몰래 보는 야한 비디오처럼 우스꽝스럽고 슬픈 풍경일 것이다. 나도 빨리 지금 이 가족이란 동맹관계를 파기하고 다른 혈맹을 찾아 떠나야하는데… 엉큼한 동생은 자기 방문을 조용히 닫아걸고 안방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에만 귀를 쫑긋하고 있으니… 나도 한심하긴 한심했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한나 언니는 너무했다. 택견장까지 가는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매일 걷고 또 걸었다. 언니는 교통비로 포테이토칩 2봉지를 살 수 있고 왕복 차비로 만화책 1권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생일선물로 산 바나나 리퍼블릭 재킷까지 현금으로 바꾸라고 하다니. ‘짠순이’가 따로 없다. “이미 산 옷을 어떻게 현찰로 바꾸라는 거야?” 형두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다. “텍만 안 떼면 얼마든지 바꿔줘. 그게 바로 백화점이야.” 되받는 한나.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연구소에 입고 온 재킷은 백화점에 환불하러 가기 전에 딱 하루만 입겠다고 사정사정해서 입고 온 바나나 리퍼블릭이다. 딱 하루만. 제발 언니야… 한나 언니는 한심한 듯 나를 보더니 “그래, 단 텍을 떼지 말고 얌전히 입어야 해!”라고 못을 박은 것이다.
심플함의 대명사. 화장실에서 재킷을 벗었다 다시 입어본다. 허리와 어깨맵시가 잘 빠진 퍼플칼라의 린넨이었다. 나는 ‘온스타일’에 나오는 패션모델처럼 시크하게 걸었다. 회의실로 향한다.
주상도 소장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는 매우 합리적이고 시원시원하게 진행되었다. 적절한 유머로 연구원들은 간간히 웃음을 터뜨렸다. 연구부원들은 연구소 소식들을 취재하는 일에도 흥미를 느끼는 듯해 보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이두나 씨, 인터뷰한 것 어떻게 됐나요? 발표해주시죠.” 주상도 소장이 나를 봤다.
“네….”
나는 상기된 표정으로 일어났다. 긴장은 오전의 속성이었다. 나는 재킷의 모서리를 당기며 주름을 폈다. 최소한의 절제된 세련이 필요했다.
“어, 이두나 씨 오늘 재킷 멋있는데요. 해외 브랜드 같습니다.” 주상도 소장의 말,
어, 알긴 아는구나. 나는 부끄러운 듯 말했다.
“예, 최근에 하나 장만했습니다.” 거짓말을 했다. 연경과 재희 쪽을 봤다. 약간 놀라는 표정. 하긴 명품 브랜드라면 이름과 상품 스타일, 고유 번호, 가격, 면세 여부까지 외우는 데는 발군이 아닌가. 자기들 외에 수입브랜드를 입고 나타난 사람은 연구소에서 나밖에 없을 걸. 우쭐거리고 싶어진다.
나는 좀 더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단상 앞에서 작업한 파워포인터를 켰다.
“이번에 저는 이형필 연구 제 1과 과장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이형필 과장님이 에너지 시너지 효과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지금 개발 중이신데….”
나는 빔이 쏘는 파워포인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형광봉으로 최근 프로젝트 연도별 성과 비교표를 가리켰다. 그때였다.
“어, 어… 이두나 씨….” 주상도 소장,
“네?”
“너무 급하게 아침에 나오느라 텍을 안 뗐나보군.”
화장실에서 재킷을 다시 입다 텍이 목덜미 뒤로 넘어갔나 보다. 아, 저, 그건… 놀라 몸을 돌리기도 전에 주상도 소장은 빠른 걸음으로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러더니 목 뒤쪽 재킷 칼라 밖으로 나온 등 뒤의 텍을, 단 한순간에, 망설임도 없이, 벼락처럼, 떼고 말았다. 참으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두나 씨는 참 멋있고 세련되지만 가끔 이런 실수가 더 멋있다니까….”
주상도 소장은 능청스럽게 텍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연구원들은 소장의 자상함에 감동했다. 나는 그 재빠른 순발력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 소장님, 감사합니다.” 나는 울음을 참으며 말을 뱉어냈다. 내가 듣기도 민망한 비명처럼 들렸다.
꿈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것은 꿈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자각이 아니다. 처음부터 꿈이 내게 맞지 않았다는 자괴감이다. 바나나 리퍼블릭…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내 얼굴은 납골당에 들어가기 직전의 얼굴이었을 거다. 멍해진 표정으로 회의실 유리창을 보았다. 몇 개월 치 카드 할부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완전 쪽박이었다.
“저, 이두나 씨, 이두나 씨….”
회의실을 빠져나오는데 주상도 소장이 급하게 뒤따라왔다.
“오늘 저녁 때 약속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