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응, 우리 엄마가 늘 말씀하셨어. 삶이란 실크스타킹의 똥 같은 거라고….”
“그게 무슨 말인데?”
“어릴 때 엄마한테 물었어. 그게 무슨 뜻이냐고….”
“응, 무슨 뜻이야?”
“그 뜻을 생각해보라고 도리어 내게 말씀하시더라.”
“음…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어서 엄마한테 또 물었어. 무슨 뜻이냐고.”
“그랬더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셨어.”
“….”
“엄마가 돌아가실 때 내가 엄마한테 물었지. 삶이 실크스타킹의 똥이라고 한 말,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그랬더니….”
“낸들 아냐. 무슨 뜻인지… 하고 숨을 거두셨어.”
쳇, 기가 막혀. 뭐야, 늘 이런 식이다. 삶은 늘 비밀을 내장한 채 인간을 충분히 고뇌하게 한다. 인간에게 기쁨도 줬다 희망도 준다. 어느 순간 약 올리고 화나게 하고 마침내 좌절해서 체념하게 하는 것, 늘 그런 식이다. 그러니 기대라는 빵을 먹을 때쯤엔 그것은 이미 딱딱해 이도 들어가지 않는다. 체념이 무르익어버린 것이다. 언제나 꿈은 미래의 것이었다. 손을 쓸래야 쓸 수 없는 난감한 상황만 남겨놓고 딱 한걸음만큼의 보폭으로 꿈은 늘 나보다 앞서 가고 있었다.
나는 이쑤시개를 들었다. 이를 후비며 입을 다셨다. 쩝쩝… “야, 이두나, 손으로 좀 가리고 해. 예의 없게….” 민진이 말했다. “야, 네 앞이니까 맘 놓고 이러지. 좀 봐줘라, 역시 이는 이쑤시개로 후벼야 시원하다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순댓집 벽에 걸려 있던 가장자리가 녹이 슨 거울을 들여다봤다. 마지막으로 식탁 위에 남아 있는 오뎅 국물을 후루룩 하고 마셨다. 스판 스커트 쪽 엉덩이를 쓱쓱 하고 긁었다. 시원하기 그지없다. 민진은 또 인상을 찡그렸다.
점심시간 끝나고 편집회의야. 빨리 가야해… 응? 그렇구나, 편집회의…
첫 번째 인터뷰 대상을 이대팔로 정한 것은 다시 생각해도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거울을 봤다. 오늘의 눈썹 라인은 정말 잘됐다니까. 약간 도도해보지만 귀엽고 여성스러운 눈썹. 에보니 펜슬로 그린 눈썹이었다. 직장에서는 역시 암고양이보다는 순종적인 푸들 형이 살아남는 생존의 방식이라니까.
저번에 민진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양이는 개성 있고 세련됐지만 개처럼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하지 않아. 예를 들면 경찰 고양이를 본 적이 없잖아. 그리고 양치기 고양이라든지 사냥 고양이, 맹인 안내 고양이, 서커스 고양이, 썰매 끄는 고양이도 말이야. 고양이는 명예를 중시 여기고 장식을 좋아하지. 그에 반해 개는 비천한 일을 시키는 대로 다 한단 말이야. 개는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는 순종형이지.”
그렇다고 나, 이두나가 품위를 떨어뜨릴 정도로 삶의 과욕을 부리는 사람도 아니다. 충분히 살아가는 데 장식을 달 줄도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귓불 뒤쪽에 아르마니 향수를 살짝 뿌린다. 재킷 어깨 깃을 탁탁 손으로 털었다. 바나나 리퍼블릭 재킷이었다.
사실 이랬다.
어젯밤 한나 언니가 거실로 갑자기 나오더니 형두에게 화를 냈다.
“야, 이 재킷 말이야.” 나는 거실에서 발톱을 깎고 있던 중이었다.
한나 언니는 형두가 언니 생일선물로 사온 바나나 리퍼블릭 퍼플칼라 재킷을 손에 들고 있었다. 형두는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야, 이렇게 비싼 걸 사오면 어떻게….” 언니는 재킷에 달린 가격표를 형두의 눈앞에 들이대며 거친 황소처럼 씩씩댔다. 나는 신문지 위에 떨어진 발톱을 하나씩 모으고 있었다. 깎은 발톱을 모아 서랍에 넣어두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야, 그래도 생일 선물이다. 사람 정성을 생각해서….”
“야, 정성은 무슨 정성, 정성이 밥 먹여 주냐? 이 돈이면 우리 한 달 식비는 되겠다. 내일 당장 현금으로 바꿔와.”
형두 얼굴이 시뻘겋게 됐다. 당연했다. 형두가 동물 병원에서 애완견 비위 맞춰가면서 주사 놓고 수술해서 번 돈이었다.
언니와 형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싸움은 생일선물로 준 재킷에서 시작했지만 옷장 열 때마다 입을 옷이 없다고 한숨 푹푹 쉰 사람이 누구냐, 에서부터 그래도 이렇게 돈을 헤프게 쓰면 어떡해, 로 나가더니 욕실치약을 쓸 때 가위로 잘라 속을 싹싹 긁어 쓰는 너야말로 병적으로 쪼잔하다로 되받아치니까, 언니는 욕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넌 화장실 변기에 조준도 잘 못한다, 이제부터 변기에 앉아서 소변봐라, 까지 집중투하하기 시작했고 아니, 내가 여자야? 어떻게 앉아서 일을 보란 말이냐, 로까지 격전장은 뜨거워졌다.
세~상에 별꼴이다. 결혼이란 참 이상하다. 그렇게 서로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고 밤낮으로 서로를 탐하던 욕망이 왜 결혼만 하면 사라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