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사랑하다
1회
0.
신부님, 요즘 이상해요. 밤에 자도 잔 것 같지 않구요. 깨어 있어도 깨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옛날 애인이 다시 찾아왔어요. 사랑한다고 다시 시작하자고…
뭐, 예를 들자면 이런 거죠. 신부님 앞에 이천 년 전에 죽은 예수님이 나타나서… 아니 예가 좀 뭣하네요. 신부님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다시 찾아와서 신부복 벗고 같이 살자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냐구요?
그가 예전처럼 나에게 모질게 하고 떠날지도 모르는데… 요즘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냥 그 남자의 속눈썹,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감촉, 눈의 광채, 각진 턱선, 코에 난 점, 낮게 깔리는 목소리, 찻잔 들 때 손가락 펼치는 모양, 그 남자의 육체, 부분 부분이 내 욕망을 자극해요. 목소리 하나하나가 내 몸을 어루만지고 애무하는 것 같아요.
내가 변탠가요? 사랑을, 정말 사랑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도 모르겠고… 저 어떻게 해야 하죠? 저 좀 도와주세요, 신부님.
제발 하나님께 기도하란 말만 빼구요. 예? 신부님~
뭐야, 맨날 기도하래!
1.
“동물들은 잉여를 만들지 않지만 인간은 더 많은 잉여를 원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거지. 그러니까 치루지 않아도 될 전쟁을 치루고 누군가를 죽이고 범죄를 일으키고 하는 거야. 사자는 배가 부르면 옆에 살진 사슴들이 초원에 지나가도 거들떠보지도 않아. 배부른 사자에게 살진 사슴은 한가로운 풍경에 불과하지.”
“….”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곳간에 쌀가마니가 가득 차도 또 채우려고 하거든.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게 인간의 욕망이란 거야. 그러니 인간에게 잉여가 생겨난 것은 저장의 능력을 알게 되고부터이지. 즉 화식을 하고부터라고나 할까.”
민진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먹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교양 있게 나이프가 들려 있다. 나이프는 순대를 막 자르고 있던 참이었다. 순대는 금방 찜통에서 건져내 윤기가 흘렀다. 윤기 나는 생의 한 장면이었다. 민진은 뜨겁다는 듯 순대를 먹으며 입을 호호거렸다. 나는 민진을 보면서 헤죽헤죽 웃었다.
순대를 먹으며 순대 집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달라고 하는 사람은 민진밖에 없을 것이다. 순대를 먹자고 한 것은 나였다. 야, 너랑 다 코드가 맞는데 정말 식성 안 맞아서 같이 못 다니겠다니까. 민진은 입이 닭발처럼 나와서는 툴툴거렸다. 민진은 베니건스, 빕스, 아웃백 스테이크 같은 웨스턴 풍 스테이크이나 파스타를 좋아한다. 하지만 오늘만은 꼭 순대를 먹어야겠다는 식성이 목구멍에서부터 그르렁거려 아침부터 민진을 조르고 졸랐다.
“과거에 떠나버린 옛 애인이 돌아와 다시 만나자면 이유는 딱 하나 뿐이야.”
순대를 소금에 찍으며 민진이 말한다.
“뭔데?” 나는 간과 순대를 함께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여자랑 자고 싶어서지 뭐.”
“뭐? 야, 너….” 입에 있던 간과 순대가 튀어나오려 했다.
“특히 건형이 걔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가 뭔지 아니?”
“뭔데….” 볼멘 목소리로 묻는 이두나,
“여자를 바닥에 눕히는 거.” 순대를 칼로 자르는 민진,
“네가, 네가 어떻게 알아. 건형이를….” 흥분한 이두나,
건형이 목소리를 전화선을 통해 들었을 때 잔잔한 연못에 누군가 손을 막 담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담그자 물결이 흔들리면서 서서히 전해지던 파동. 그건 내 심장의 파동이었다. 비 오던 날 자동차 안에 뜨거운 입김으로 가득 차 오던 숨결, 그건 비늘처럼 떨리던 격정이었다. 그런데 건형이를 그렇게 말하다니…
“왜, 몰라. 대학 다닐 때 숱한 여자들 동시에 거느리는 바람둥이로 유명했잖아. 건형이 걔는 자신을 위대한 유혹자로 생각하고 있거든. 어떤 여자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민진은 잠시 순대를 우물거리며 삼켰다.
“인간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잉여를 원한다니까. 순종적인 푸들, 애교떠는 암고양이, 식탁 차리는 일개미, 새끼 낳아주는 돼지까지 모두 다(뭐야, 동물원을 차리고도 남겠군). 그러니까 김태희, 한예슬, 김혜수, 최지우 다 필요한 거지. 너도 그 수많은 잉여 중에 하나일 뿐이야. 이두나. 정신 차려….”
“….”
“강하게 거절하는 법도 배워야 삶이 너를 만만하게 보지 않는 거야, 삶이란 실크스타킹의 똥 같은 거거든.”
“실크스타킹의 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