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그는 차를 가지고 나를 픽업하러 온다고 했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그가 한 말은 “저녁은 뭘 먹을까?”였다. 칠 년간 연애하고 지금 막 꿈 같은 신혼을 살고 있는 맞벌이 부부가 저녁 때 만나 멋진 레스토랑을 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글쎄.” 내가 대답했다. 그는 다정다감한 신랑처럼 빙긋 웃었다. 그는 여전히 면도가 잘된 갸름한 턱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는 시청을 통과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렸다. 가로등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파이낸스 센터, 프레스 센터, 프라자 호텔, 덕수궁… 빌딩 유리창 불빛이 새어나왔다. 차들이 일제히 라이트를 켜고 서행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큐빅처럼 반짝였다. 불빛이 켜지자 세상에 새로운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잘 지냈어? 그동안 어떻게….”
그는 핸들을 잡고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뭐? 잘 지냈냐고? 보면 모르냐? 그야말로 파열된 역사의 한 현장이었다고. 맹렬하게 돌진하던 열정은 무참히 살해되고 시신은 산을 이루고 피는 강을 이루었다고. 오래된 추억들은 썩어 쓰러지고 기억은 치욕을 당했지. 시간은 남아 있는 육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 이렇게 55사이즈가 훨씬 넘어가게 됐어. 풍만하던 가슴은 쳐지고 검고 긴 머리는 윤기가 바랬어. 피부는 파운데이션 없으면 기미가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잘 지냈냐고?
“응. 그럭저럭….” 나는 소리 죽여 말했다.
“그랬구나. 다행이다. 난 내가 너한테 너무 모질게 하고 헤어져서… 오늘 네가 연락 안 할 줄 알았어.”
윽, 전화버튼을 눌렀던 내 엄지손가락을 사시미칼로 뚝 하고 잘라버리고 싶다.
“아직… 결혼… 안 했지?”
건형은 처음으로 약간의 떨림을 내장한 채 물었다. 사시미칼로 자른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 앞을 주시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무표정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건형은 사실을 확인하고는 초야제 때 마을 처녀의 처녀막을 확인한 성주처럼 꽤 만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건형에게도 달라진 게 있었다. 삼년 전 마티스는 벤츠 미니로 바뀌었다. 긴 장발의 터벅머리는 짧은 스포츠형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나에게 보내는 미소는… 그러니까 그 미소는 좀더 조심스럽게 상대를 타진하는 전략가의 눈빛이랄까. 아니면 좀 더 부드럽게 유리잔을 다루려는 와인 소믈리에 같다고나 할까. 그랬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앞 유리창에 뚝뚝하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격렬하게 불어왔다. 바깥에 모든 것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린다. 불안한 청춘에 몸을 맡긴 혼 같이 나무들이 술렁거린다. 와이퍼가 분주하게 빗물을 쓸어냈다. 차안은 평화로웠다. 건형이 차안에 히터를 틀었다. 케니지를 틀자 뭔가 감흥이 떠올랐다. 따뜻해지는 차 시트. 김 서리는 유리의 감촉, 빗물에 반짝이는 길가 나뭇잎들. 잠시 시간이 멈추는 듯한 순간,
드디어 내 손이 건형의 손을 덮쳤다. 그리고 말한다.
“오늘… 오늘… 우리 삼 년 만에 만난거야. 이래도 되는 거야?”
나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건형의 손끝은 이미 허벅지 사이로 들어와 좀 더 목표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건형은 “으응… 그렇지… 미안해.” 하면서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뒷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이 나려 했다. 순간 내가 건형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유가 다시 떠올랐다.
사실 격렬한 감정이란 것은 의식 속에 있는 어떤 통사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다. 매혹, 열정, 욕망, 격분, 좌절, 이런 것들은 통사법을 벗어난 끈적끈적한 감정의 덩어리다.
건형을 좋아할 때 왜 좋아하는지 어떤 점이 좋은지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헤어져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표정, 하찮은 손짓 같은 것. 뒷머리를 미안한 듯 웃으며 긁적이는 표정, 코에 난 작은 점, 웃을 때 깔깔대던 목젖, 따뜻하게 감싸 안던 팔.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무슨 통사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두 팔로 나를 안고 온몸을 마비시킬 정도로 영혼 밑바닥까지 끌고 가는 길고 뜨거운 키스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그를 증오하고 있었을 것이다. 몸은 모든 것을 샅샅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 건형에게 내가 말했다.
“다음에 우리 저녁 먹자. 근사한 곳에서.”
해서 나는 사시미칼로 뚝 자른 손가락을 다시 붙이기 위해 황급히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