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순간 머릿속에 윙 하고 충격적인 전기가 들어왔다. 오늘 늘어진 면 팬티를 입고 왔다는 사실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안전한 날에만 입는 면팬티. 보풀이 잔뜩 일고 늘어질 대로 늘어진 일명 안전일 팬티였다.
건형은 한옥마을 아궁이에 불이라도 땔 듯 손끝이 뜨거워 있다.
“그때, 전동 성당에 들어가 함께 기도하면서 말이야… 우리 같이 기도했잖아….”
그래, 기도할 때 너 눈뜨고 있던 거 나도 봤어. 나 눈 감았다 살짝 떴었거든.
“우리의 사랑을 지켜달라고… 말이야.”
그래, 이 새끼야. 그리고 니가 날 버렸잖아.
“역시. 이두나, 너 만한 애가 없더라… 정 많고 남자 마음 이해해주는 여자 말이야….”
정 많고 남자 마음 이해해준다는 건 만만한 여자란 뜻이잖아. 나쁜 자식아~.
건형은 뜨거워진 입술을 귓불에 댔다. 혀로 핥기 시작했다. 손끝이 다리 사이 파인 곳을 향했다. 나는 허벅지 사이에 더욱 힘을 줬다. 윽,
“저기, 여긴….”
“그래, 너 순진한 애라는 거 알아.”
나, 이제 애 아니거든. 너 만날 때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청바지에다 편안한 티셔츠 입던 이두나, 이제 없어. 차라리 그때 어깨나 가슴이 파인 톱이나 밑위 길이 짧은 로 라이즈 진을 입었어야 하는데. 아니 장난스럽게 살랑거리는 미니스커트를 입었어야 하는데 말이야.
학회가 끝나고 꺼두었던 휴대폰을 켜는 순간, 나는 어둠 속에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건형의 문자였다.
꼬박 삼년 만이었다. 그의 문자를 읽고 또 읽으며 나는 우두커니 세미나동 소나무 아래 서 있었다. 마침 조경하는 아저씨들이 철제 사다리를 놓고 소나무 가지들을 전지하고 있었다. 가지들이 뚝뚝 시멘트바닥으로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소나무 가지는 아직도 살아서 푸덕거리는 물고기 같았다. 가슴에 쿵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그것은 다시 물을 만난 생선처럼 푸덕거리며 기억을 뿜어냈다. 저 어두운 기억 속에서 조각조각 과거가 몸을 일으키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프루스트의 시간처럼.
건형의 알듯 모를 듯한 기막힌 미소. 가지런한 윗니. 소프트 아이스크림같이 녹아내리던 목소리. 그것은 어떤 악마의 목소리보다 더 달콤하게 내 가슴을 핥았다. 어느 기차역 카페에서 먹던 햄이 가득한 샌드위치, 따뜻한 우유가 떠올랐다. 함께 듣던 케니지의 연주와 시원한 향수냄새. 그의 손과 내 손을 깍지 낀 채 걷던 홍대 뒷골목. 골목 담벼락에 선 채 목덜미부터 시작하여 입술을 찾아가던 키스까지.
과거의 모든 감각들이 손아귀 속에 생생하게 잡히는 듯했다. 과거 장면 하나 하나가 느닷없이 내 앞에 출몰하다니. 마치 내 주머니 속에 잊고 있던 동전이 튀어나온 것처럼….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그가 보내었던 마지막 문자도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젠 그만 만나….” 아악, 거기까지. 거기까지, 그래. 그 이상은 더 이상 생각조차 하기 싫은 문자들.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슴에 누군가 뾰족한 칼끝으로 날카로운 무늬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세상에 홀로 남게 되는 외로움, 그건 사막 같은 공허감이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나온 대로 라면 커피 한 잔의 열량은 5kal, 키스 5분의 열량과 같다.
그렇다면 3년 동안 우리가 나눈 키스의 열량은 얼마나 될까? 사랑의 열량은, 그 에너지는 다 어디로 간 걸까. 어디로…
‘오늘밤 만나자’ 한마디였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오랜만이라든가, 어떻게 지냈어, 라든가. 뭐, 그런 말부터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불친절한 두 개의 단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늘밤 만나자’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소나무 가지가 다시 뚝 하고 땅에 떨어졌다. 쓸쓸함과 달콤함이 함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때로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약간은 서글퍼지기도 하는 법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났다. 거대한 전자석에 이끌리는 철 조각처럼 나는 그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두나? 이두나구나….”
또 다른 역사의 서막을 여는 팡파르가 귓가에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