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갑자기 강력한 전하가 대회장 안에 쏟아졌다. 좌중 사람들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조용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류의 힘이 사방으로 뻗어갔다.
나는 석사 학위에다 연구소 비정규직에다 더욱이 여자 연구원에 불과했다. 나를 아주 연하고 말랑말랑한 먹이로 본 것이다. 전구 중심에 있던 나는 금속 필라멘트처럼 뜨거워져 곧 타버리거나 녹거나 쨍하고 갈라질 것 같았다.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만만해? 어쩌면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니. 세상은 나를 너무나 함부로 대한다.
손에 서서히 힘이 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나는 일격의 필살기로 적의 목을 단칼에 따기 위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일어나려 했다. 그때였다.
“단 오 분이라도 발표자의 발표를 듣도록 합시다. 어쨌든 논문 발표를 듣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게 아닙니까.”
좌중에서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유관순이 일본 순사들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던 외침보다 더 반갑고 정겨운 목소리였다. 나를 위해 엄호사격을 하고 있는 사람. 나는 좌중을 훑어보았다. 잘생기고 지적인 눈매에다 뽀얀 피부가 빛나고 있는 남자였다. 연구소 소장 주상도였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언제 소장이 왔지?
사회자 S와 주상도 소장 사이에 잠시 전기 스파크가 일었다. 주상도와 사회자 사이에 미묘한 위계가 정해지는 순간 사회자 S가 꼬리를 내렸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오 분의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다. 걸인에게서 동전 하나 인심 쓰듯 던져주듯이.
‘야, S! 너 오늘 제삿날 면한 줄 알아? 응? 너 정말 오늘 운 대개 좋았어. 알겠어? 눈알 파서 구슬치기 하려 했는데 내장 파서 순대 만들려 했는데… 소장을 봐서 내가 참는다. 참어. 어휴, 이 주먹이 운다.’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활짝 웃으며 사회자 S를 봤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발표를 최대한 요약해보겠습니다.”
건형은 점자책을 읽듯 꼼꼼하게 손끝으로 내 허벅지를 더듬었다. 몸의 모든 감각을 느끼려는 듯했다. 정념은 추억에 잠긴 듯도 했다.
“기억나? 우리 전주 한옥마을 갔을 때 말이야…”
그는 나의 왼쪽 귓불에 뜨거운 김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으응…”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겨우 한마디 했다. 건형의 손이 그 다음 어디로 올까 궁금했다. 나는 애써 다리를 모았다. 허벅지 쪽으로 접힌 스커트를 다리 아래로 당겼다. A라인 스커트라 엉덩이 쪽이 역시 끼었다.
하필 이런 날 만날 게 뭐람. 학회 발표가 있는 날 말이다. 연구원 티가 팍팍 나게. 나는 무릎 바로 밑까지 내려오는 감색 세미 정장 투피스에 렌즈 대신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차림이었다. 완전 전투 복장.
건형의 손끝이 허벅지에서 조금 위쪽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몸 끝이 단단하게 긴장했다.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젖꼭지가 간질간질해진다. 훅, 설마 팬티의 습기를 눈치 챈 것 아니겠지…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꼼짝 않고 앞을 주시한다. 심호흡을 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심 야경은 화려하고 평온했다. 도로에 자동차 불빛이 길게 줄지어 지나갔다. 긴 혀로 도로를 핥고 있다. 관능적인 향기를 뿜어냈다. 불빛이 따뜻하고 평온한 탯줄처럼 온 몸에 감겨왔다.
‘Hyatt’
도로변 여기저기에 세워둔 자동차가 어둠을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듯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건형과 내가 탄 파란색 벤츠 미니도 어둠을 사수하는 것에 동참했다.
산 아래에는 남산 식물원과 도서관이 있다. 고등학교 때 새벽 도서관을 다니기도 했다. 그리곤 생각했다. 남자 친구가 생기면 남산 드라이브를 하겠다고. 그렇다고 드라이브 끝에 자동차 안에서 서로를 물고 빨고 핥고 하는 연인들이 있다곤 상상하지 못했다. 땀과 침이 얼룩진 끈끈한 시간들이 가득 차 있으리라는 것도 몰랐다.
도심의 불빛들이 화려해졌다. 어둠이 깊어져가고 있다. 불빛이 다시 눈꺼풀을 깜빡였다. 불빛은 제멋대로 어둠을 살라먹었다.
어둠의 미로 속에서 나도 뭔가를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움츠렸다. 내 몸속 어둠 속에서 뭔가 딸깍 하고 전지가 켜지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도대체, 도대체, 얼마만인가.
온몸에 전기가 들어왔다. 짜릿짜릿해진다. 팬티 아래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