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참, 제목 한번 거창하네. 민진의 말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이 힘의 역사에 대해서 오래 고민해오던 전기 걸이란 말이다. “야,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계속 데이터베이스 돌리면서 준비해온 주제야.”
나는 약간 신이 올라 있었던 것 같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19세기 초까지 정보가 전해지는 속도는 고대 수메르 인들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즉 전보가 생기기 전, 18세기까지 인류는 고대인들과 같은 삶을 살았다. 전보의 발명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두 도시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마부는 450킬로그램도 넘게 나가는 동물을 진흙투성이 길로 때로 쓰러진 나뭇가지 위로 몰아야만 했다. 전보가 발명되자 스위치가 세계의 시간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신문에 속속들이 외신과 속보가 도착했다. 신문은 더 이상 느긋한 토론이나 우아한 잡담이 실리는 곳이 아니었다. 대중 정치 운동이 빠르게 솟아나고 공장의 신기술이 더 빨리 전파되었다. 전보의 건조한 문장에 영향을 받아 헤밍웨이 식의 새로운 산문체 단문형이 태어나기도 했다.
논문 테마 대략의 서두는 이렇게 출발하고 있다.
대회장 좌중을 살펴본다. 맨 앞자리엔 과학계의 거물로 특허만 몇 백 개라는 M교수가, 한 자리 건너엔 전기통신 쪽 프로젝트를 다 ‘싹쓸이’하고 있다는 T교수가 앉아 있다. 게임 프로그램으로 명성이 알려진 빠찡꼬의 대부 Y교수는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다. 그는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리니지 게임 최신 버전이었다.
사회자 S가 대회의 시작을 알리자 약간의 담소와 은밀한 밀담을 나누던 패밀리들이 엄숙해졌다. 패밀리들은 모두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니면 오늘을 D데이로 잡아 검은 가방에 이미 신문지로 싼 사시미칼을 넣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에 어느 학회장에서 학회 전체를 접수하려는 조직끼리의 패싸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학회 회장이 되려고 한쪽 패밀리에서 먼저 움직였다. 마이크를 뺏고 책상이 뒤집어지고… 많은 졸개들을 데리고 와 학회장에 풀었다는 소문이었다.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또 그 예의 어정쩡한 상태랄까. 엄마, 아빠 중 한쪽, 짬뽕과 자장면 중 어느 한쪽도 선택하기 힘든 중간 상태, 짬자면 정도 된다.
패밀리에 가입하기 위해선 아닌 말로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는 자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조직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배때기’를 따라면 딸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피를 보는 것은 우리 집안의 가계 전통상에서 보아서도 끔찍하게 싫어하는 체질이다. 외조부께서는 피 보는 것이 끔찍해 방안에 들어온 모기도 잡지 못했다. 조부께서는 피 뽑아 피검사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다 수혈을 못해 돌아가셨다. 그리고,
사실 말이지 패밀리에서 여성은 예외적일 수밖에 없다. 넘버 투나 넘버 쓰리는 모두 남자다. 여자는 넘버를 따는 일에도 늘 제외됐다.
Q대 교수가 발표를 시작했다. 차분하고 성실한 발표였기에 지루하고 따분했다. 보스들 중 몇몇은 지난 밤 과음 때문인지 지나친 성욕 때문이었는지 졸기 시작했다. 고개를 떨어다가 침을 흘리는 보스도 있었다.
시계를 봤다. 내가 발표해야 할 시간까지 Q대 교수가 다 잡아 먹고 있었다. Q대 교수가 시간을 잡아먹는 도둑이란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도둑질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회운영상 사회자가 나서서 “예, 시간관계상 그 정도로 하시고 정리를 짧게 해주시….” 라고 말할 줄 알았다. 시간 도둑질을 막는 호루라기 한번쯤은 불어줄 줄 알았다. 그러나 사회자 S 또한 Q대 라인에 있는 지방보스였다. 그는 잠잠했다. 나는 초조했다.
Q대 교수는 좌중이 조용하자 사람들이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을 애써서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자신의 심도 높은 학술발표에 스스로 심취하여 시간마저 잊고 있던 천진한 학자의 표정을 지었다.
마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본의 아니게 시간을 너무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무리 사과멘트가 오 분을 훌쩍 넘겼다. 예의 갖추는 것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차리는 예의가 얼마나 다른 사람에겐 결례가 되는지 모른다.
나에게 부여된 시간은 점심시간까지 딱 십 분 뿐이었다. 사십 분의 시간이 몸통, 머리, 팔, 다리 다 잘라먹고 발가락 정도만 남은 격이었다.
갑자기 좌중에 앉아 있던 Q대 학회 진행자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S에게 귓속말을 했다. 둘은 그들끼리의 전류를 주고받았다.
사회자 S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학교 식당에 점심식사가 예약되어 있답니다. 시간 관계상 이두나 연구원께서는 십 분 안에 끝내야할 것 같은데요. 논문 페이퍼를 보니 꽤 긴 발표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발표자가 발표를 생략하고 토론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해주는 게 좋겠습니다.”
세상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한 논문인데… 해도 해도 너무했다.
S는 그렇게 말하곤 나를 슬그머니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이런 거였다.
‘좋은 게 좋은 거야.’ 그것의 속뜻은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였다. 그가 번쩍번쩍 거리는 사시미칼을 들이대며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