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건 사람들의 오랜 습관이다.
하긴 그럴 만하다. 지구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어? 놀이동산의 접시기구보다 더 빨리 돌고 있는데.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벌써 현기증으로 쓰러지고도 남는다.
그러나 거짓말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믿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전기광학학회장에서 무수하게 쏘아대는 전기빔처럼 말이다.
Q대학 자연과학대학 세미나동이라 했다. 세미나동은 숲길을 지나 한참을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 있었다. 가을 햇빛 속에서 후드티를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내려오고 있었다. 배낭을 메고 두꺼운 하드커버 책을 옆에 끼고였다. 그들은 뭔가 진지하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했다. 옆에 끼고 있는 하드커버 책 때문인지 그들이 무척 학구적인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어젯밤에 본 메이저리그 야구 9회 말 경기에 대한 것은 아닐 듯했다. 어제 먹은 상하이 파스타의 맛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다. 여긴 Q대학이다. 학문적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강한 햇빛 탓일까. 약간 어지러워졌다. 지구가 빨리 돌고 있다는 과학자의 말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목 뒤로 약간의 땀이 났다. 서서히 몸 안으로 긴장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 학회 발표순서는 오전 마지막 차례다. 처음은 Q대학 전임교수, 바로 다음이 나였다.
자연과학 세미나동 앞에는 학회 안내 화살표가 벽에 붙어 있었다. 화살표를 따라 들어갔다. 학회장은 2층 소강당. 나는 전기에 이끌리듯 2층 계단을 올랐다.
라디오, 텔레비전, 인공위성, 무선전화기도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장을 만들어낸다. 전기는 고요한 연못에 손을 담그면 물결이 생기는 것과 같은 파동을 뿜어낸다. 커다란 접시에 담긴 젤리가 흔들리듯 말이다.
학회장은 전기로 충전되어 있었다. 방전되는 불꽃처럼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각자 보이지 않게 만들어내는 파동이 힘의 장을 만들어냈다. 힘들은 거미줄처럼 조직을 엮었다.
학회가 시작되려면 30분이나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이미 보스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전국 각 조직의 보스들은 각각의 패밀리와 함께 나타났다. 학문적 명성답게 대개 검은색, 회색, 감색 양복차림이었다. 위엄 있는 표정도 잊지 않았다. 가방 모찌들이 검은 가방을 들고 검은 안경을 끼고 각 보스들 옆에 서 있었다.
명동파 보스는 동대문파 보스가 패밀리를 이끌고 나타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 있게 악수를 청했다. 두 개의 전극은 서로의 눈을 맞추며 지지직 전류를 교환했다. 넘버 투와 넘버 쓰리, 그 이하 졸개들이 명동파 보스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그러자 상대편 패밀리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나자 보스들은 검은 양복 상의를 벗어 가방 모찌에게 맡겼다. 대회장 맨 앞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가방 모찌가 보스의 가방과 양복 상의를 받아들고 그 뒤를 따랐다.
여러 보스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보스는 조직원이 오십 명이 넘는 곳도 있었다.
각 보스들은 다른 많은 이름들로도 불렸다. 그 별명들은 그들의 명성을 한 번에 알게 할 정도의 파워를 지녔다. 일테면 이런 이름들. 곰발바닥, 대걸레, 쌍도끼, 공포의 치매, 무법의 사타구니…
전국 조직들이 다함께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들 각자 자기 식구들 챙기기도 바빴다. 자기 구역 관리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어린 졸개마저도 보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맘대로 주제를 정해 논문을 발표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아래 졸개들을 손봐주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보스들은 격세지감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들이 졸개시절에는 꿈도 못 꾸던 하극상이었다. 그래도 일 년에 몇 번 있지 않는 학회 행사였다. 이 년에 한 번씩은 회장 선거도 이루어졌다. 이들로서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행사기도 했다.
명동파는 최근에 그들의 지분을 넓히고 있다는 소문이다. SCI 논문 발표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다른 파에서도 긴장을 하고 있는 듯했다. 동대문파에서도 마땅히 긴장을 해야 할 일이었다. SCI1가 아니면 CSI2에라도 논문을 발표해야 하나? 동대문파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동대문파는 동시에 다른 패밀리들의 회동 이를테면 대한전자공학회, 통신학회의 움직임까지 신경이 쓰이고 있는 판이었다.
나는 학회보스들에게 인사하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갔다. 거울 속에서 마스카라를 정리한다. 립라인을 다시 선명하게 하느라 입술을 착착 맞추어 본다. 마지막으로 양쪽 눈을 힘 있게 몇 번 깜박거린다. 화장실문을 나선다. 나는 단정하고 야무진 논문 발표자로 보이고 싶다.
오늘 발표주제는 석사논문 이후 오랫동안 준비해오던 테마다. 박사논문 테마로도 생각하던 차라 나에겐 꽤 중요한 작업이었다. <전기발명이 낳은 매체 변화의 사회학적 접근>.
1.
2. 과학수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