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새 연구소장 양복바지 허벅지 쪽이었다. “아, 어떡해….” 커피는 내 흰 블라우스 봉긋하게 솟은 부분까지 침범해 있었다. 뭐야. 꼭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하다니.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다급하게 티슈로 소장의 양복에 커피 얼룩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여자 연구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회의실 안은 잘못 건드린 금속이 징하고 울리는 듯했다. 순수한 실수가 순수하지 않게 오인되는 순간이었다. 백열등도 잠시 난감한 듯했다.
“아, 괜찮습니다….” 옷을 털며 말하는 예의바른 목소리.
세일 때 큰 맘 먹고 산 브랜드 옷 단추가 입자마자 또르르 굴러 떨어진 듯한 낭패감, 그것이었다. 어느 정도 수습이 되자 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장은 말끔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번에 연구소장으로 부임한 주상도입니다. 차차 각 부서에서 업무보고를 받겠지만 오자마자 소식지 편집회의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소는 모든 업무보고며 연락을 온라인으로 하죠. 심지어 바로 옆 자리에 있는 사람한테까지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미래 사회는 오히려 네트 바깥에서 실감으로 느끼는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될 겁니다. 온라인상에서 만나는 냉랭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소식지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목소리가 맑았다. 단정하면서 위엄을 지닌 어투. 깨끗한 만년설이 녹아 험준한 바위 골짜기 사이로 쏟아지는 듯했다. 시원하면서 환한 미소. 품위 있는 제스처.
회의실에 앉아 있던 연구원들이 모두 그를 쳐다봤다. 소장은 샤워라도 하고 싶은 시원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새 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 버튼을 채웠다. 이태리제 수제양복이었다. 짧게 목례를 했다. 이 고급스러운 품위에 연구원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더니 환호와 함께 박수를 쳐댔다. 얼떨결에 나도 박수를 쳤다.
연경과 재희도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감탄과 호기심을 반반씩 얼굴에 섞은 채로. 후배 여자 연구원들이었다.
나쁜 년들. 지들은 애인도 있으면서…
연경과 재희는 연구소에서 알아주는 고상함과 도도함을 자랑하고 있다. 사무실 여자 급사에게 가혹할 만큼 일을 부려먹었다. 커피, 복사, 은행 심부름은 기본이었다. 심지어 어떤 때 개인 자동차 키 복사하는 일, 고장 난 휴대폰 수리 센터에 갖다 주는 일까지. 계급사회의 표본을 몸소 실천했다. 당당했다. 그들은 자기계발도 열심히였다. 영어회화에 일어 회화, 피트니스에서 몸매관리까지 했다.
민진은 뭐, 노처녀들에게 자기계발이란 현대사회에서 자위행위에 불과해, 라고 말했지만… 쩝.
고상과 도도가 큰 프로젝트를 정부기관에서 따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몇십 억짜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 돈이면 우리 연구소가 근 2년은 아무 일을 안 하고도 꾸려나갈 규모였다. 그 전에 있던 소장은 고상과 도도 앞에서 최소한 비굴해보이지 않을 만큼 친절했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칭찬했다. 환심을 사려고.
— 어머, 오늘 연경 씨 스카프 멋있네. 재희 씨 화장 오늘 정말 잘 먹었다. 얼굴이 많이 배고팠나봐.
소장은 나름 유머를 준비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유머 모음을 밤새워 검색했는지도 모른다. 회식 자리든 회의에서든. 스위스제 화이트 초콜릿 같은 달콤하고 쌉싸래한 칭찬이었다. 만약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식사를 한다면 그들은 소화불량에라도 걸렸을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먹을 만한 것들은 고상과 도도 앞에 놓이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모두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
그럼 살이라도 쪄야 했다. 조개스프와 통닭구이, 통후추를 뿌린 연어스테이크와 데리야끼 소스에 버무린 돼지고기 안심… 이것들은 다 그들 몸의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일까. 브랜드 마임의 44사이즈를 입고 나타났을 때 내 몸에 붙어 있는 55를 보면서 등짝에 파란 등급표가 잘못 찍힌 돼지처럼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신은, 불공평한 것이다.
“저, 이두나 씨라고 했죠?” 새 연구소장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복도로 나오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