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연구 1과 과장 이대팔이 나를 부른 것은 오전 이른 시간이었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눈두덩이 잔뜩 부어 있었다. 탱탱 언 쭈쭈바로 눈두덩을 문지르고 싶다.
그때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두나 씨, 1과 과장님이 오시라네.”
스키니.스타킹이 좀 댕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았다. 나는 스커트를 펴면서 맵시 있게 일어났다. 연구소에서 내 별명은 일명 ‘스타일리쉬’. 연구소로 오면 몸의 스위치는 'ON'으로 켜진다.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OFF'. 자동 스위치가 내 몸에 장착되어 있다. 나는 전기 걸이다. 연구실과 집에서 ON/OFF 자동 변신이 일어나는.
집에서는 ‘OFF'상태. 검은 뿔테 안경에 헤어밴드에 양쪽으로 머리를 묶는다. 보풀이 잔뜩 인 면 팬티에 스트라이프 무늬 죄수복 티를 입고 있다. 그러나 나의 ON상태는 이렇다. 맥 스크로브 메이크업베이스 펄로 반짝반짝 빛을 준 피부에 파운데이션을 붓으로 바르고 프라리 파우더 분을 붓으로 바른다. 세도우는 공식적인 일반 모임에서 퍼플, 친구를 만나거나 특별한 날을 위해서는 스모키 정도. 마스카라를 올리고 눈은 반짝반짝하게 칼라 렌즈를 낀다. 마지막으로 화이트로 포인트를 주면 얼굴은 끝.
나는 양손으로 부어오른 뺨을 살짝 덮었다 뗀다. 날씬한 고양이처럼 섹시하게 미끄러지듯 걷는다. 과장실에는 이미 맹아부가 이대팔 옆에 손을 부비는 자세로 서 있었다.
“우리 연구소에 새로 연구소장님 오신 거 알지?” 이대팔은 볼펜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말했다.
“네?… 언제요?” 놀라는 이두나.
“오늘 부임했어.” 현수가 말하던 그 작자인가 보다.
“새로 오신 소장님이 워낙 나이스한 분이라 특별히 부임식이니 환영회니 그런 것 안 하시겠대. 바로 업무보고며 회의에 참석하시고, 참 대단한 열정파야… 역시 수재는 달라. 그렇지 않은가?” 그러자 맹아부가 그럼요, 그럼요, 하면서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우리 연구소에서 전에부터 기획해오던 일이 있었는데 연구소 소식지를 만드는 일이야. 소식지라고 홈피에 올라가는 정도는 아니고 연구소 안팎에서 일어나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 부터 시작해서 에세이, 기행문, 작지만 유익한 생활 정보 등을 담는 것이지. 한마디로 연구소 연구원들끼리의 친교와 대외적 홍보 효과를 위한 거라구… 에, 이두나 씨가 다른 잡지에 글도 기고한다고 들었는데….”
나는 낯을 붉혔다. 기고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보지 않는 회지 스타일의 얇은 책자였다. 아는 후배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그러니까 휴대폰에 수시로 뜨는 대출광고처럼 무책임하게 써나간 글들이었다.
“아, 예, 저… 그렇지만… 쓴다고 할 수도 없는… 뭐, 오타나 오문 정도 찾아주는… 교정 교열정도랄까….”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렇지, 교정, 교열 찾아주는…그 정도면 대단한 거야. 안 그런가?” 이대팔은 맹아부와 서로 마주보고 히죽거렸다.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마음에 팍하고 정전기가 인다.
“소식지를 낸다고 사람들이 읽겠어요? 다들 실험 결과 보고서 읽는 것도 버거워서…. 저번에도 소식지 비슷한 거 내다 얼마 안 있어서 종간했잖아요. 과장님….”
전에 나왔던 소식지로 연구소 사람들이 점심 때 시켜 먹은 자장면 그릇을 싸던 모습이 떠올랐다. 타블로이드 지였다. 그릇을 싸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자장면 그릇, 순두부 그릇, 냉면 그릇. 음식 메뉴는 다 달랐다. 하지만 모두 소식지로 둘둘 감싸여 있었다. 마침 그달 소식지에 기행문을 투고했던 내 사진에 순두부 국물이 벌겋게 떨어져 있었다. 불인두가 내 얼굴을 지진 듯했다. 끔찍했다.
“그러니까, 자네 같은 사람이 연구소를 빛낼 만한 사람들 만나 인터뷰도 하고 연구소 소식도 전하고… 뭐, 그런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선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머리를 너무 무리하게 돌려서는 어지럽고 허탈할 뿐이라 했다. 이렇게 저렇게 발뺌하려던 생각들이 머릿속의 체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맘에 안 든다고 박 깨고 싸울 수 있는 위인도 못 된다. 그렇다고 숨어서 자기 의견이 아닌 세상의 의견인 양 뒷공론에 은근슬쩍 무임승차하는 뻔뻔스러운 자도 못 된다. 나는 묵묵히 또 침묵의 카드를 선택한다.
이대팔은 두 개의 전지가 만나 번쩍하고 소리를 내듯 손뼉을 탁하고 쳤다.
“됐어. 그러면 된 거라고 믿고. 오늘 오후에 당장 편집회의부터 하게….”
새로운 전류가 연구소에 흐르고 있다. 학계뿐만 아니라 정계에서까지 촉망받는 실력자가 연구소장으로 오다니. 왠지 단순하게 지나가는 정전기나 불꽃같지는 않다. 새롭고 강력한 힘의 장이 형성되는 듯한 느낌. 공기 중에 막대한 전하가 흐르는 것 같다.
“아, 이두나 씨, 편집회의 때 커피 좀, 준비해주세요.”
맹아부는 나보다 늦게 들어온 입사후배. 입사후배가 선배에게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고. 나는 맹아부의 뻔뻔스러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탁 치고 싶다.
“아, 예, 그러죠. 먼저 들어가세요. 저 몇 잔을….” 나는 말 잘 듣는 물방개처럼 맹아부를 올려다봤다.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고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편집회의 주재 자리에 앉아 있는 연구소장 앞에 커피를 내려놓는다. 슬쩍 그를 본다. 이목구비 뚜렷한 구도, 백열등처럼 환한 얼굴빛, 쭉 뻗은 콧날, 미남형에 가까운 턱선. 새로운 전류가 몸속에 지도를 그리며 지나갔다. 순간 위험 수위를 조절하는 온도감지기가 고장이 났다. 턱선을 보다 나도 모르게 커피를 엎지른 것이다.
“아악~”
나는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