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샤워를 하면서 욕실 거울을 보았다. 화장용 비누 거품 사이에 드러난 가슴과 엉덩이를 보며 움켜쥐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했던 육체는 서서히 탱탱한 탄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얼마 전엔 오른쪽 가슴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 있었다.
“야, 붉은 반점? 크크… 그거 노화의 증거야. 노화의 증거….”
민진이 내 엉덩이를 찰싹하고 때리며 웃어 재꼈다. 세포가 늙어가면서 멜라닌 색소가 피부 표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그러니까 서서히 붉은 불안이 표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나는 낡은 책상 서랍을 정리하기 위해 서랍을 쏟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서태지 1집 앨범<난 알아요>와 2집 앨범 <발해를 꿈꾸며>, 그리고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 엷은 보라색 모토로라 삐삐, 그리고 언제 헤어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남자친구와 찍은 반짝이 스티커 사진이었다.
‘영원한 연인 두나♡신현’, 스티커에 반짝이 펜으로 쓰인 글자를 보면서 남자친구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연인(?) 남자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요일 팬티와 캐릭터 팬티는 이미 나달나달해져 있었다. 쓰레기통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사실 말이지 나의 이십대를 돌이켜보면 불안보다 안정을 못 견뎌하던 때였다. 반듯한 범생이보다 반항적이고 불친절한 남자에게 더 매력을 느꼈다(물론 그 대가는 상처였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다가 불쑥 사표를 냈다. 자아를 찾겠다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물론 백수 신분이라 카드 값 갚느라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가난한 살림에 유학을 가겠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물론 엄마한테 삼복 날 똥개 얻어맞듯 얻어맞았다). 그렇게 거칠고 불편하고 고독해야만 그럴듯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이십대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무척 골치 아픈 나이다. 세세한 일이 하나하나 맘에 걸리고,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쭐해지거나 콤플렉스를 느낀다. 삶은 뭔가 드라마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사랑은 물불 안 가리는 열정이 있어야 하는 줄 알고, 잘 사귀다가도 어느새 “야, 우리 사랑은 가짜야!”라고 외치며 뒤돌아선다. 그러니까 이름하여, ‘안전 거부증’.
그러나 삼십대가 되면 모든 게 분명해진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소하고 세속적인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세상살이를 좀 더 알게 된달까. 오랜만에 걸려오는 동창의 전화는 대개가 보험가입 권유라는 것. 공주병으로 소문난 동창이 집들이 오라고 하면 십중팔구 값비싼 패물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처음엔 누구나 그렇다. 『모범적인 이성교제를 위한 데이트 매뉴얼』이란 책을 열심히 따라 읽으며 줄을 친다. 『연애, 노력한 만큼 성공한다』『연애의 기술』『연애를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한 데이트 코스』『연애를 하면 세상이 보인다』…
연애를 위한 교본들은 서점에 넘치고 넘쳐난다. 그러나 뻔하다. 연애의 수순은. 처음에 서로에 대한 호기심 속에서 설렌다. 적절한 다툼이 있다. 스킨십을 동반한 절정기. 그리고는 낙하, 결별이다.
그러니까 연애는 매우 성실하고 일정한 법칙대로 만들어 먹는 라면 끓이기 같은 것이다.
우선,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주세요.
(탐색기, 어디 사세요? 휴일에는 뭐 하세요? 약간의 비음이 필요하다)
둘째, 물이 끓으면 스프와 라면을 넣어주세요. 냄비물이 끓어 넘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사소한 다툼, 삐쳤다가 화해하는 것은 연인들의 필수 연애 과정이다)
셋째, 라면이 끓고 있을 동안 식탁 위에 신 김치를 준비해주세요.
(화해정국, 내가 잘못했어. 약간의 눈물과 포옹이 필요하다)
넷째, 다 끓인 라면을 맛나게 먹으면 됩니다.
(절정기, 보고 싶어 죽겠어~ 전화비 모텔비 무지 나온다)
다섯째, 그릇에 식은 면발 몇 가닥이 남아 있기도 하죠.
(권태기, 너 이빨에 고춧가루 끼었어! 금방 깬다)
김치라면, 감자라면, 파라면, 콩라면, 매운 라면, 순한 라면, 라면의 종류는 여러 가지지만 끓이는 것은 다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네가 내 마지막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나불거리는 놈과 연애의 슬픈 진실을 만들어갈 때쯤 세상의 모든 일이 법칙대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구나 하고 한숨을 쉬게 된다. 나를 낚아채듯 안아 말에 태워 성에 데리고 가는 왕자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달콤한 마시멜로 같은 연애를 꿈꾸는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해피한 생활이 아니라 젠장, 해괴한 이별밖에 없었다.
『이성교제를 위한 데이트 코스』는 얼마 안 가 2단계 『남자, 이렇게 꼬셔라』『여우가 되는 법』『밤에 뜨거운 여자 되는 법』으로 넘어가다 급기야 3단계 싱글녀의 필독서 『위풍당당 그녀의 맛있는 하루』로 마감되곤 한다.
나, 이두나? 1단계는 물론 가볍게 지나왔고 2단계도 간단하게, 그리고 3단계를 준비 중이라고도 할까. 나는 우아한 석사학위의 비정규직 여성이다.
사람들은 만만하니까 말한다.
“시집이나 가~”
여기 “시집이나”에서 ‘나’라는 조사는 그러니까, 너는 매력 없고, 무능하고, 어디 내놓아도 상품가치 완~전, 떨어진다는 말이다. 아주 나를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만만한 밥으로 보는 게 틀림없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턱주가리를 밥숟가락으로 한 대 딱 때리고 싶다.
서른둘 넘은 여자가 좋은 남자를 만날 확률? 누군가 말한다. 그런 확률은 숲길을 걷다 벼락 맞을 확률, 벼락을 맞고 살아남을 확률, 벼락 맞고 살아남아 외계인에게 납치될 확률보다 낮다고.
여자 나이 서른둘. 예수가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은 나이보다 딱 일 년이 모자란 나이. 아, 사랑을 하기엔 너무 늙었나. 옛날에는 같이 죽자는 남자도 있었다(너 내 돈 안 갚으면 같이 여기서 뛰어내리자!). 나 때문에 죽겠다는 남자도 있었다(계속 따라다니면 나 죽어버릴 거야!).
그 많은 싱아는 누가 다 먹었단 말인가? 1
그러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사이에 오직 결혼에만 불을 밝힌 ‘기집애들’이 쓸 만한 남자들을 다 채갔던 것이다. 새벽 도서관에 한 번도 간 적도 없고, 독서는 패션 잡지 뒤적이는 걸로 대신하고, 자기계발은 성형외과 드나드는 게 전부인 줄 아는 여자애들이 남자들을 다 채 갔다니까. 그렇다니까.
젠장, 그뿐인가.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더 어린 여자를 찾고(기가 막혀, 이건 시대가 바뀌어도 정말 변하지 않네) 예쁜 여자만 찾는다(결혼하면 얼굴도 안 보고 살 거면서).
요일 팬티와 캐릭터 팬티는 이미 옛적에 졸업한 나는 백수와 취업여성 사이에 끼어 있는 비정규직 여성, 석사학위 때문에 결혼 정보 업체에서 B조차 되기 힘든, 꽃띠를 훨씬 지난, 전업주부도 전문직 여성도 아닌 싱글녀. 어설프게 상사 앞에서 웃고 있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물방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