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아니 세상은 삼십대 비정규직 미혼 여성에게 선택할 거리를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어머, 저는 발사믹 소스 샐러드에 요리사 특제 소스를 끼얹은 농어로 하겠어요 라고 말하는 이십대가 아니다. 삼각김밥과 컵라면, 떡볶이와 튀김으로 배를 채우는 십대는 더더욱 아니다. 대학이든 전공이든 남자든 옷차림이든. 선택의 여지는 더더욱 없었다.
기껏해야 노화방지 아이크림은 어느 제품으로 쓸까, 뱃살방지를 위해 저녁 대용으로 검정콩국을 먹을까 닭가슴살 샐러드를 먹을까 정도가 다였다. 선택의 바통은 세상으로 넘어가 있었다.
두 눈을 등대처럼 반짝이며 세상의 모든 비밀을 캐듯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구원은, 고통과 오물덩어리인 이 세상에 죽기로 작정하고 둥지를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정규직 명함을 갖는 것, 그것 하나밖엔.
일이 나의 전부이고 안간힘이었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될 말을 끝끝내 하지 않는 인내 같은 것이기도 했다. 생활이 거칠게 나를 할퀴었다. 웃을 때 눈가 주름이 잔뜩 잡혔다. 일과 시간은 여성에게 더 가혹한 것이다.
나는 괜히 벽 쪽을 두리번거렸다. 붉은색 발이 내려온 일본풍 벽지에는 낙서가 쓰여 있었다.
“×새끼, 내 인생 돌려줘.”
“현우와 지우, 모월 모일 다녀가다.♡”
메모를 보면서 현우와 지우는 지금도 사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선배들 소문 들었어? 우리 연구소에 새 연구소장이 온다는 말. 이대팔과 둘도 없는 선후배간이라 하더라고요.” 현수가 말했다.
“그래?” 민진이 현수를 봤다.
“카이스트 수석 입학, 수석 졸업에다 MIT 객원교수, SCI논문 한국 최고 보유자? 대단한 사람이야. 한국 원자력 쪽 실력자에다 학계 여러 곳 임원. 주상도 박사, 그 사람이 온대.”
“뭐? 주상도?” 민진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누군데…?”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거리는 이두나.
“야, 주상도? 신문에서 한국 미래 과학자 열 명 중에 속한다는 주상도. 차기 과학기술부 차관 물망에도 오른 사람인데….” 민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음, 실력자가 우리 연구소장으로 오다니. 의왼데? 하며 민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또 줄 설 사람 하나 생긴 건가?”
나는 진초록 재킷을 탁탁 펴며 마스카라가 올라간 눈썹을 들어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야, 이두나. 너 그렇게 얌전 안 떨어도 돼. 나 있을 땐 말이야.” 민진의 핀잔에 남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나 선배는 원래 스타일에 신경 쓰잖아요. 늘 멋있고 세련되고….” 목이 멨다. 오, 제발 더, 더, 더 찬사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듣고 싶은 찬사를. 나는 현수를 쳐다보았다. 그윽한 갈망을 담은 눈빛으로.
하지만 현수는 딱 거기까지다.
“야, 현수야, 얘, 두나, 그렇게 스타일리쉬한 사람 아니야.” 나는 뭐야? 하는 눈빛으로 민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민진을 째려봤다.
“야, 이두나, 네가 아무리 마스카라 속눈썹 완전 죽이는 퀸카고 엣지 있게 옷 입고 다녀도 우린 서른둘이야.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결혼 정보업체에서도 우리 같은 싱글녀는 절대 사절인 거 몰라? 물 흐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