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그들은 서로 달랐기에 서로를 강렬히 끌어당겼다. N과 S처럼.
형두가 언니와 열렬하게 연애를 시작한 때는 마침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였고 들뜬 분위기였다. 형두는 추위에 매우 민감했다. 코트를 걸치기 전에 네 겹의 점퍼와 스웨터를 입었는데도 그는 자주 감기에 걸렸다. 특히 콧물을 많이 흘렸다. 그는 언니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편지를 다 쓰기까지 코를 33번이나 풀었다. 그의 기침소리는 너무나 컸다. 마치 우렛소리 같았다. 누군가가 들었다면 불륜의 연인들이 침대 헤드에 머리를 찧고 소리를 지르며 격렬하게 섹스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어린 아이가 백일해를 앓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나 언니는 형두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형두를 잘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 박형두, 오늘 웬일로 한나 언니 일찍 들어왔네.” 순대를 우적거리며 말하는 이두나.
한나 언니는 택견사범이다. 택견장에서 늘 늦게 집에 돌아오곤 한다. 언니는 가만히 있는데 형두가 다시 소리를 친다.
“야, 이두나, 너 형부한테 자꾸 박형두, 박형두 할래?” 그럼, 나는, “야, 박형두, 너 처제한테 자꾸 이두나, 이두나 할래?” 한다.
연구소에서 프로젝트 1차 보고회가 끝나는 날 장염도 나았다. 우리 나이엔 아픈 것도 죄악이야…. 민진의 말이었다. 1차 보고서를 제출하자마자 민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귀에 속삭였다.
야, 날도 날인데 우리 한잔 걸치자. 후배 현수도 따라붙었다.
연구과학단지 연구동을 나와 이십 분 정도를 차로 나오면 시내였다. 길가로 쭉 늘어선 가로수길 한 블록만 지나면 번화한 카페 거리가 나왔다. 카페 안은 캔들과 조명등으로 웨스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향기롭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한 늦여름 밤. 세상의 모든 모퉁이를 부드럽게 핥고 있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민진과 현수와 함께 선택한 곳은 엔틱한 나무 목조 건물 이층 로바다야끼집. 일본식 선술집을 퓨전으로 꾸민 집이었다.
민진과 현수는 독구리에다 나가사키우동와 메로구이를 시켰다. 테이블의 작은 초가 장식 물컵 위에 동동 떠 있었다. 간식으로 나온 튀긴 국수를 과자처럼 씹으며 민진이 내뱉듯 말했다.
“서정의 시대는 막을 내린 거야. 세상의 종말이 와도 나는 아부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맹세는 다 웃기는 자장면이야. 점심 먹을 때 어땠는지 아니?”
민진은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벌써 독구리잔을 여러 잔째 털어 넣고 있었다. 민진은 조그만 잔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한 잔을 다시 입 속에 쏟았다.
“아부만이 살길이다 싶더라. 정말, 눈뜨고 못 봐 주겠더라고, 맹아부, 이구아나. 우와~ 대단한 자기력이야. 지구의 모든 철대가리들이 다 붙겠더라. 우리하고 같이 들어온 비정규직 걔네들 있잖아. 어머, 어머나, 어쩜 그렇게, 어머 그렇군요… 연발이었다고.”
그리고 우리는 모두 서글프게 깔깔거렸다.
우리 같은 삼십대 초반 비정규직의 운명이란 게 늘 그렇다. 모아둔 돈이 있는 알뜰살뜰한 직장인도, 미래가 번듯한 팀장님도 아니다. 서민아파트에 사는 전세 처지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은색 승용차는 절반이 빚. 영락없이 조직에 충성하고, 월급날에 목숨 걸어야 할 ‘빼도 박도 못하는’ 신경쇠약 직전의 인간들이다. 그나마 야식이라도 하고 술로 피로를 달래다 보면 “어머 임신? 몸이 왜 그렇게 부었어?”라는 야유를 듣기 십상이다.
“인생에서 불행이 끈덕지게 재발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다 권력을 숭배하기 때문이야. 권력에 대한 숭배가 인간을 가장 비굴하게 만들거든….”
민진은 사뭇 진지했다. 이어 말했다.
“권력은 다양한 욕구들을 획일화하려 해. 획일화로 자신의 권위와 힘을 드러내려 하지. 하지만 세상에 다양한 기호를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린 왜 매일 된장찌개 아니면 생선탕, 칼국수 아니면 보리밥, 참치김밥 아니면 소고기 김밥이냐?” 민진이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뭐 그것만 있나? 짬뽕 아니면 자장면, 목살 아니면 삼겹살, 안심 아니면 등심, 이 남자 아니면 저 남자, 선택해야 할 것들은 많고도 많다.
“그러게,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방식에 대해서 관대하지 않아. 자기 사고방식 외에는 진실이나 이성적 기준이 없다고 생각한다니까. 이거야말로 배타적 독선이지.” 술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놓으면서 이두나,
“일테면 내가 닭발을 먹든 돼지족발을 먹든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곱창을 먹든 내장탕을 먹든 무슨 상관이냐고. 먹고 싶은 메뉴 자율화를 위해 민주화 운동 다시 일어나야 한다니까.” 메로구이를 뒤적이며 툴툴거리는 이두나,
“아니, 선배, 닭발하고 돼지족발 좋아하세요?” 남현수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아, 아니,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더듬는 이두나,
“나야, 이태리 정식 파스타, A1 소스를 잔뜩 뿌린 미디엄 웰던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를 좋아하지….” 나는 닭발을 씹다 아깝게 입 밖으로 뱉어내듯 말했다.
민진이 풋— 하고 웃었다. 그러자 입에서 우적대던 것들이 내 얼굴로 다 튀었다.
뭐야, 너… 아, 미안, 미안… 너무 웃겨서…
나는 민진을 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