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나는 문을 살그머니 닫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벌써? 그럼 형두는 여자에게 씩씩거리며 말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도대체, 네 동생은 무슨 눈치도 없냐? 정말 쟤 때문에 내가 죽겠다. 죽겠어. 신혼 재미도 못 보고 이게 뭐냐? 응?”
그러면 한나 언니는 시큰둥하게 “그러게….” 하고는 침대 위에서 뒤로 발랑 돌아누울지도 모른다. 형두는 그 모습에 또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느낄지도 모른다.
“야, 그래도 할 건 다 해야지.” “야, 됐어!” 한나 언니는 또 예의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옷을 꾸역꾸역 입을 게 뻔했다.
형두, 박형두는 촌뜨기처럼 콧김을 씩씩거리며 변비완화제를 잘못 먹은 개구리처럼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다. 박형두는 문을 박차고 나온다. 물론 속옷만 적당하게 걸친 채.
“야, 너 이두나. 남의 신혼 살림집에 언제까지 얹혀살래?”
그러면 부엌에서 뭐 먹을 게 없나 냉장고를 열던 나는 이틀 전에 먹다 만 순대를 발견하고 순대를 찍어먹을 소금을 찾느라 접시를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상대로 형두는 안방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야, 이두나.” 소리를 빽 지르는 박형두. 형두는 저격대상을 발견하고 조준하는 저격수처럼 나를 노려봤다. 가증스럽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순대를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속이 좋지 않지만 순대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라…). 그걸 보더니 형두는 가장 형두다운 말을 했다. 목소리를 깔고.
“야, 야, 이두나, 그거 손으로 그냥 집어 먹으면 어떻게 해? 비위생적이게. 손은 씻었어?”
그러면 나는 속으로 깔깔대는 것이다.
형두와 한나 언니가 결혼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 중에 하나다. 이 넓은 우주에는 불가사의한 행성들이 떠돌아다닌다. 그러면서 중력으로 서로를 밀고 당기고 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일수록 서로를 더 열심히 그리워한다. N극과 S극이 강렬하게 서로를 당기듯이 말이다. 한나 언니와 형두는 N과 S였다.
한나 언니가 7년 동안 펜팔해오던(그렇게 고전적인 방법이 21세기에도 이루어지고 있다니!) 펜팔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시큰둥하게. 나는 그 인간이 박형두인 줄은 몰랐다. 형두는 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알고 있던 불알(?) 친구였다. 유치원 동기였다. 때때로 그냥 지나친 줄 알았던 인연이 어느 순간 다시 현재로 불려올 때가 있다. 한나 언니가 형두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는 순간이 그랬다. 나는 그때 삶이 순수한 우연성에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필연이라 불리는 순수한 우연 말이다.
형두와 한나 언니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이들은 수십 년간 살아온 부부 같았다 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400페이지 논문을 써도 될 만큼 박식해 있었다. 일테면 「이한나의 인간성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박형두 한 인간에 대한 심층심리학적 접근」 따위 말이다.
연인은 상대방의 종교, 직업 혹은 운동과 취미에 대해서 이미 반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다만 이들은 뒤에 따르는 아주 자잘하고 사소한 문제에 봉착했다. 즉 자잘한 문제를 이해할 능력을 습득하지 못했달까.
그들은 먼저 서로의 나이를 속였다. 음식을 먹을 때 특유의 행동이나 습관에 대해서도 속였다. 한나 언니가 음식을 먹을 때 시끄럽고 게걸스럽게 먹는다거나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제대로 놓지 않고 양손으로 들고 먹는다거나, 빵조각으로 김칫국물을 닦아 먹는다거나 하는 거 말이다.
사실 서로를 잘 안다는 것과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서로를 잘 안다고 해서 서로를 잘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연인들은 “넌, 단 한순간도 나를 이해한 적이 없어!” 결별을 선언한다. 물론 자신을 잘 이해해준다고 해서 그 곁을 떠나지 않는 법도 없긴 했다.
둘은 멀고먼 별에서 온 것처럼 충분히 다른 종족이었다.
한나 언니의 식성은 나와 비슷했다. 내장탕, 닭발, 순대국밥, 돼지족발 이런 따위. 그에 반해 형두는 아침으로 크림소스에 담긴 계란, 크루아상 1개, 포도 약간, 커피 약간 그 정도였다. 한나 언니가 매사에 시큰둥하다면 형두는 매사에 예민하고 민감했다.
이런 적이 있었다. 둘은 신혼여행으로 경주를 갔다.
형두는 전통문화답사를 좋아했다. 하지만 신혼여행까지 경주로 선택한 것은 최악이었다. 경주는 초등학생들의 방학숙제용이다. 하지만 한나 언니는 늘 그렇듯이 시큰둥하게 뭐 그러든가… 했다. 둘은 렌터카를 빌렸다. 경주를 향했다.
“와~ 저 탑 어때? 정말 대단하다. 그치?” 형두가 말했다.
“뭐 별로. ” 한나 언니가 응수했다.
“와~ 불국사다. 멋있다.” 형두가 말했다.
“뭐 별로. ” 한나 언니가 응수했다.
그러다 그들은 천마총 고분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내 마음에 들어.”
마침내 한나 언니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닭 연골 씹기를 좋아해서인지 언니는 뼈와 뼈 잔해에 관심을 보였다. 언니의 판결에 아마 고대 신라 사람들의 유골은 기쁨에 떨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