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일찍 집으로 왔다. 화장실을 다섯 번은 족히 왔다 갔다 했다. 장이 탈이 난 게 분명했다. 민진은 약국에서 약까지 사왔다. 늦여름에 장염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집에 가서 빨리 쉬라고 어깨까지 토닥거렸다.
조직은 정규직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더 잔혹한 것들을 요구했다. 이들에게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병에 걸리는 일이다. 그것은 미래를 담보한 채 매일매일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이 쉴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 여행 같은 것이었다. 감기약을 먹을 때 몽롱해지는 정신과 몸이라니. 그건 현실에서 뿅 하고 사라지는 어떤 아름다운 잠적을 떠올리게 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신고 있던 샌들만을 벗어둔 채 일부러 화산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져버렸다. 그 전설은 아름다운 상징이다. 한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구소를 나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 그러면 영원히 나오지 말라고 하겠지? 쩝…
아니긴 해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으슬으슬 오한이 드는 듯했다. 형두에게 고춧가루를 듬뿍 풀어 콩나물국을 끓여달라고 해야지. 형두는 콩나물국을 잘 끓였다. 콩나물처럼 생겨서…
그러나 요즘 형두는 예전 같진 않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산을 바라보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 집은 서민아파트다. 아파트는 산을 배경으로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다. 휴일이면 등산객들이 산을 내려왔다. 플라스틱 흰 물통을 들고 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휴일을 제외하면 이곳은 조용한 곳이었다. 나는 언덕을 오르며 호프집에서 먹다 남은 땅콩을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연구소 회식 후 2차에서였다. 호프집에 갔던 것이다(나는 음식점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다 싸오는 습관이 있다. 원래 성격이 쪼잔하다).
연구소 연구원들이 호프집에서 술을 더 주문하겠다며 잠시 자리를 뜨고 나선 그들은 다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홀로 남겨졌어도 나는 땅콩에 맥주 한 잔을 마셨다. 꼿꼿하게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는 그전에 연구소 소장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여기서 ‘우리’는 연구소 연구원들을 말한다).
소장은 소장이란 이유만으로 충분한 안줏거리가 되었다. 통통한 볼살과 위엄 있는 눈빛을 가진 자. 대체로 말이 없는 그는 말을 아끼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자였다. 대부분 보스들이 그렇듯 말이다. 모든 권위에 부하직원들이 굴복하기를 원했다. 해서 마음껏 화를 냈다. 우리는 어휴, 그 인간, 그 인간하며 늘 소장을 안줏감으로 삼았으니 그는 충분히 보스로서 자격이 있었다. 소장은 정직하고 어리석었다. 한편 영리하기도 했다.
그런 소장도 골고루 매콤한 양념이 잘 밴 닭구이와 통감자를 보면 환장할 것이다. 주말 저녁이면 아내와 슈퍼마켓에 갈 것이다. 일상 대소사에 관여하고, 복잡한 애정관계로 눈물을 훔칠 것이다. 손톱을 깨물기도 하고 친구를 질투할 것이다. 잠자리에서 비아그라를 찾아 땀을 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인간적인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도 했다. 나는 위압적인 인간 내면이 갖고 있는 갖가지 일상사의 비밀을 들추는 이야기를 했다. 한층 신이 나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 반쯤 남은 500cc를 한번에 들이키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았다. 테이블에는 아무도 없었다. 빈 500cc 잔만 가득 테이블 위에 나뒹굴었다. 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쓰윽 훔쳤다. 윗몸을 한번 휘청하고 일어났다. 아래를 보았다. 일주일 전에 산 베네통 겨자색 재킷에 빨간 핫소스가 묻어 있다. 수제 소시지를 찍어먹던 소스… 호프집 테이블보와도 같은 색이었다. 나는 잔뜩 인상을 쓰고 숫자가 많이 적힌 계산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회식을 마치고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둔탁한 비닐봉지가 내게 날아들었다.
“야!~”
형두였다. 형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뼈째 아작아작 씹어 먹을 눈빛으로
“너, 뭐야….” 했다. ‘이렇게 여자가 늦게 다니고….’ 이런 말이 이어질 줄 알았다. 아니면 ‘여자가 밤늦게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고….’ 이런 말.
그러나 야만적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까지 연구소에 있다 온 거야? 연구소 일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너, 비디오, 제때 반납도 안 하고… 대체 뭐하는 거야? 연체료 얼마 나온 줄 알아? 비디오 가게에서 다섯 번이나 전화 왔단 말이야!”
“어휴, 반납하면 될 거 아냐. 정말 왜 이래. 개 같은 내 인생이군.”
“뭐, 개 같은 내 인생? 야, 네가 개 같은 내 인생이면 나는 뭐냐? 야, 말이 났으니까 말인데 생활비 같이 내고 있지만 네가 내는 것은 우리 전체 생활비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액수야(이럴 때 남자가 제일 쪼잔하다). 석사학위까지 받았으면서 월급이 그게 뭐냐? 그러는 주제에 무슨 말이야. 호강하는 줄 알아. 내가 밥해주지 빨래해주지. 나 같은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아, 아, 알았어. 오늘 기분 별로란 말이야. 건드리지 마.” 하고는 나는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꽝 하고 닫았다. 그러면 형두는 금세 “어, 어, 그랬어? 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살갑게 나올 줄 알았다.
“야, 비디오나 갖다 주고 와. 당장!” 형두는 인정사정없었다. 어떻게 여자를, 그것도 미모의 여자를 이 밤중에 그것도 11시도 훨씬 넘은 야심한 시간에 비디오 가게에 갔다 오라 하는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