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아, 이 눈동자들, 냉장고 속 계란을 깨뜨렸을 때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병아리의 눈동자 같은. 뭔가를 갈망하면서 뭔가를 원망하는 듯한. 곧 원망과 기대로 갈릴 우렁찬 눈동자 같았다. 나는 홍해 앞에 선 모세처럼 지팡이를 들어야 할 판이다. 쩍― 하고 홍해를 갈라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이미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두나 씨, 원래 한식 좋아하잖아? 된장찌개 좋지?” 이대팔의 말,
“이두나 씨, 오늘같이 꿀꿀한 날엔 칼칼한 생선탕이지? 그렇지 않아?” 손진영의 말,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갈 때가 있다. 지금이 그때다.
나는 힘없는 눈빛으로 양쪽을 쳐다보았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인간을 너무 외롭게 만든다. 선택 앞에 설 때 인간은 가장 고독하고 숭고한 바퀴벌레가 된다. 왜 항상 인간은 그 경계에 있어야 하는가. 왜 선택의 경계는 항상 인간을 고독하게 하는가. 시골 외갓집 염소는 토끼풀도 뜯고 강아지풀도 뜯는다. 씀바귀도 냠냠 잘만 먹는다. 상추면 어떻고 배추면 어떻겠는가. 풀밭에만 풀어놓는다면.
이런 순간 이 지구에서 딱 사라지고 싶다. 그러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의리를 지키는 일. 아픔을 아픔 자체로 받아들일 줄 아는, 아픔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그, 그러니까, 저는 말이죠… 등줄기에서 땀이 한 줄 흘렀다.
“배가 아파서… 도저히 점심을… 못 먹을 것 같아서….”
내가 듣기에도 비참했다. 지구라는 행성에 막 도착한 에이리언 같았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를 지탱하던 지구의 자기장에서 풀려난 듯했다. 허우적거리며 뛰었다. 왠지 우주자기장 밖으로 밀려난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이두나, 너 미쳤니? 돌았니? 이형필 과장님이 된장 먹자 하면 된장 먹으면 되는 거고 곰국 먹자 하면 곰국 먹으면 되는 거잖아?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된장인지 똥인지 구분도 못하고… 그러니까 오년 째 비정규직인 거야. 너 연구소 밥 몇 년 먹는데 아직도 누구한테 줄 서야 하는지 모르니?”
“….”
“너를 뽑아준 사람은 이형필 과장이야, 이형필 과장. 은혜를 알아야지.”
이구선은 무슨 주문을 외우며 고함을 지르는 고함 원숭이 같았다.
“그러니까 말이지.” 팔장을 끼는 이구선,
“그러니까 말이지, 네 말은, 줄을 잘 서란 말이잖아.” 말을 받는 나.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구선,
“왜, 반말을 하냐고?” 말을 잇는 나,
“그, 그래, 반말하면 내가 불편하지~” 입을 앙다물 듯 말하는 이구선,
“나는 지금 전임연구원 이구선 박사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 학교 동기 이구선과 이야기하는 거거든. 반말하니까 아니꼬우세요?”
얼굴을 붉히는 이구선, 목소리까지 떨면서
“당연하지. 엄연히 신분이 다르잖아.”
“그러니까, 전임연구원으로 네가 잘 하셔야지요.”
“내가 뭘?”
“줄 잘 서는 거나 궁리하고 자나 깨나 이대팔, 아니 이형필 과장 뒤꽁무니나 따라다니고 영수증 챙겨 연구비 빼돌릴 생각이나 하고 비정규직 실험연구 보고서 빼내 네 이름으로 연구보고서 만들고. 그래서 한국 녹색 에너지 연구소 선임연구원이라 할 수 있겠냐고. 환경 에너지 정책에 진짜 프로젝트 같은 프로젝트 하셔야 하지 않겠냐고?”
이구선이 인상을 쓰며 뒷머리를 잡는다. “나 혈압, 혈압….” 하고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
“줄 서는 거 고민하다 석쇠 위에 줄 쭉쭉 난 생선 신세나 될 것 같아 딱 사표 내고 싶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네가 좋아하는 카페모카 우유 팍팍 넣어 만들어갈 테니 이대팔 과장과 잘 잡수세요.”
“뭐? 뭐?” 뒷머리 잡고 혈압 올라가는 이구선.
설마, 위와 같은 장면을 내가 연출할 거라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알다시피 오 년 째 비정규직은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지반 위의 완두콩일 뿐이다. 지진으로 그 거대한 지층 밑에 사라진다 하더라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완두콩. 그러니까 쌀쌀한 동짓날 한강 위에 오리 같은 신세랄까. 그야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잡히기 시작한 내 목주름을 슬슬 문질렀다.
이구선, 아니 이구아나가 다시 꿱꿱 소리를 질렀다. 귓속이 쟁쟁거린다. 오금이 저려왔다. 나는 목을 빼 연구1과 사무실을 휙 둘러보았다. 사무실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어디선가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을 게 뻔했다. 안심이 됐다. 나는 힘차게 구십도로 고개를 숙였다.
“예, (형님!) 시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