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3.
연구실 안은 고요했다.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서로 아는 체 안 하는 정부(情夫)처럼 생뚱한 얼굴이었다. 범인은 이미 사라져 버린 걸까. 책들이 콘크리트 바닥에 쏟아져 있다. 액자는 떨어져 있다. 의자들이 뒹군 채 누워 있다. 책상 위 집기가 쏟아져 있다. 잘 흐르던 시간이 둔탁한 둔기에 얻어맞고 멈춰버린 것처럼.
조교는 잘하던 대로 코를 킁킁거려보았다. 군견처럼. 그의 코는 성능 좋은 감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름에는 특히. 대번에 커튼 뒤에서 누군가를 찾아낸다. 이대팔, 이대팔이다.
“어… 어? 교수님? 왜 여기 커튼 뒤에 숨어 계세요?”
“어, 응….”
CSI에 나오는 피에 흥건하게 젖은 시체까지는 아니지만, 녹색에너지 프로젝트 기밀프로그램을 훔치러온 산업스파이까지는 아니지만, 컴퓨터 하드를 훔치러 온 좀도둑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대팔이었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헤어졌던 애인의 전화인 줄 알고 받으면 늘 부동산 투자를 권하는 텔레마케터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는 이메일을 황급하게 열어보면 유료 오늘의 운세 사이트 이벤트 참여다. 꼭 인생은 이렇게 어긋난다니까.
단정하던 이대팔(2:8)의 가르마가 마구 흐트러져 있다. 그는 올챙이배와 짜리몽땅한 하체를 가진 두꺼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주섬주섬 옷을 털며 일어났다. 훅하고 땀 냄새가 솟아난다. 와이셔츠 단추가 젖꼭지가 보이는 지점까지 풀려 있다. 저번 스승의 날 제자들이 선물한 핑크색 니나리찌 와이셔츠였다. 얼굴엔 홍조를 잔뜩 띤 채였다. 흥미로운 논문 주제가 떠올라 흥분한 학자의 눈빛은 아니었다.
“교수님… 실은 학장님이 찾으시는데요….”
이대팔은 이마에 번질번질한 땀을 닦으며
“으응… 학장님이? 나를?”
“근데 무슨 일이라도….”
“글쎄…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
“내가 왜 여기 있지?” 더듬거리는 이대팔,
조교는 민망했다. 괜히 자신의 초록색 티셔츠의 앞섶을 똑바로 잡아 내린다.
“왜 이렇게 덥니? 야, 조교, 시원한 물 좀 갖다 줘!”
이대팔은 양 볼을 실룩거리며 뻔뻔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소의 항문이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이대팔은 에어컨을 켜기 위해 리모컨을 찾았다. 다시 땀을 뻘뻘 흘린다. 와이셔츠가 반은 젖어 있었다. 하지만 핏빛은 아니었다.
조교는, 아니, 나는 문밖으로 나가 연구실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또 다른 공모자가 범행현장에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대팔에게 양복바지 남대문이 열렸다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입가에 짙은 핑크색 루주가 뭉개져 있다는 말은 그래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복도로 몸을 돌려 천천히 조교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시원한 냉수에다 침을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 저번 커피에는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냉수는 단서가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약간의 기포 같은… 웃음을 희죽 하고 날렸다.
범죄는 그러니까, 여러분이 상상하던 범인의 짓이 아니었다.
이대팔 연구실에서 들려온 우당탕하던 범죄의 흔적. 침입자의 기미. 범인은 기밀문서를 빼내려는 산업스파이나 멍청한 좀도둑이 아니었다. 이대팔과 핑크색 루주의 몸부림. 격렬하고 격정적이지만 남몰래 해야만 하는 불우한 연인의 섹스 현장이었다.
어느 여름 오후였다. 내부자 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범죄의 흔적은 사라졌다. 이대팔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나를 다시 ‘족치기’ 시작했다.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나의 이십대가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