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
여름이 끝나가는 어느 오후였다. 범죄의 흔적이 연구동을 덮쳤다. 범인은 다행히 한 연구실만을 택한 듯했다. 연구실은 오래된 미루나무가 있는 쪽 연구실이었다.
조교는 교수의 연구실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알았다. 학장이 전임 교수를 급하게 찾고 있었다. 휴대전화도 꺼져 있고. 교수는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학장은 무슨 일인가 약이 오른 원숭이 같았다. 뭐 언제나 화가 나 있긴 했지만. 화내는 것으로만 아랫사람을 다스리려 했다.
학장의 전화가 왔을 때 조교는 자신이 써야 할 석사 논문 자료를 읽고 있던 중이었다. 전화 목소리로 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조교는 다급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좀 더 급한 목소리로.
“교수님, 학장님이 급히 찾으셔서….”
자신이 들어도 충분히 애교 넘치는 목소리였다.
방안이 여전히 조용하자 조교는 복도로 몸을 돌리려 했다. 조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다했다 생각했다. 그녀는 조교실로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연구실 안쪽에서 쿠당탕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책들이 쏟아지는 소리. 철제의자 넘어지는 소리. 사람의 짧은 외비명, 다급한 발자국 소리. 참 별스러운 일이다.
조교는 다시 연구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교는 조교실로 급히 달려간다. 서랍을 연다.
열쇠꾸러미를 꺼낸다. 쨍그랑 서로의 몸을 부딪치는 열쇠들.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바삐 걸어가는 집오리처럼.
어느새 자신이 뛰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열쇠꾸러미에서 205호 열쇠를 찾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피가 온통 머리끝으로 몰린다. 열쇠구멍으로 열쇠를 넣는다. 온몸에 피가 터지는 듯하다. 그건 어쩌면 알 수 없는 희열인지도 몰랐다. 문을 열게 되면 괴상한 풍경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끔찍한 시체라도 좋으니 제발 이 조교 생활의 따분함을 날릴 수 있으면 좋겠다. CSI에서 본 그대로 말이다. 시체는 나신으로 누워 있는 젊은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다. 발가벗겨진 채 뒤로 손목이 묶여 있지 않아도…
실험용 메스에 목이 찔린 사람이 비명을 지르면서 하늘로 팔을 쳐들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깔고 피로 가득한 눈꺼풀 밖으로 조직이 튀어나가 있는… 그 조직 한쪽 끝에 눈알이 매달려 있는… 피범벅이 된 입으로 범인에 대한 짧은 몇 가지 단서만이라도 남길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맞게 된다면 일단 힘껏 비명을 질러보는 거다. 연구동이 떠나가라 한번도 질러보지 못한 비명을. 그러고는 어떻게, 어떻게…를 외친다. 어쩌면 이런 일이… 학교에서 일어나다니… 말을 잇지 못한다. 덜덜덜 떤다. 뒤늦게 도착한 경관 복장을 한 누군가가 다가온다. 따뜻한 모포로 자신을 감싸며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다. 그리곤 카페모카를 권할지도 모른다.
조교는 좀 전에 본 피 흘리며 쓰러진 시체를 다시금 생각한다. 그러다 의자에 앉아 흐느껴 울다 배를 움켜잡고 구역질을 할지도 모른다. 이런 끔찍한 장면은 처음이에요… 하면서 말이다.
갑자기 생이 생생한 육식의 핏빛으로 숨 막히게 격렬해질지도 모른다. 이태리언 레스토랑 저녁 메뉴로 나온 스테이크를 썰 때처럼 말이다. 썰 때마다 핏물이 접시로 스미듯 흘러나오는… 레어. 강렬한 욕망과 슬픔이 발효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사건, 핏빛으로 남아 있는 날것으로의 사건을 만나고 싶었다. 때로 극적인 사건이 모호한 삶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