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최종회)
꽃에 물을 주던 어머니의 손에서 물 호스가 떨어진 순간에, 거짓말처럼 끝 방의 문이 열렸다. 남루한 차림에 지친 듯 무거운 배낭을 멘 여자가 마당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눈은 방금 방에서 나오고 있는 청년을 보고 있었다.
서영아! 청년이 넘어질 듯 달려 나왔다.
“서영아!”
여자 앞에 서서 믿을 수 없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청년에게 여자가 배시시 웃었다. 눈이 퀭한 청년이 너무 야위어 앙상한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무거운 걸 메고 있니?”
“아주 멀리서 왔거든.”
여자가 숨을 몰아쉬며 작게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였다.
“너 맞지? 꿈 아니지? 그럴 줄 알았어 서영아, 정말 왔구나, 정말 왔어!”
청년이 휘청 껴안자 여자가 눈두덩을 문지르며 노을에 물든 얼굴로 활짝 웃었다. 손도 거칠고 얼굴도 거칠고, 함부로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아기 같은 눈이 반짝였다. 다 낡은 배낭끈을 쥔 채 청년의 얼굴을 하나하나 걱정스레 뜯어보던 여자가 명랑하게 말했다.
“내게 새 가족이 생겼어.”
그리고 배를 한껏 내밀었다. 그제야 커다랗게 부푼 배를 발견한 청년이 놀란 눈으로 여자를 살폈다. 의혹에 찬 눈이 차츰 가늘어지면서 그런 채로 생각에 빠지더니, 눈빛이 조도를 낮춘 불처럼 천천히 부드러워졌다.
“그랬구나.”
꿈꾸듯 말했다. ‘그랬구나, 우리 서영이.’ 그리고는 눈부터 조금씩 웃기 시작하더니 여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뻐. 아주 이쁘다 서영아.”
날아갈 듯 가냘픈 어깨를 쓸어주는 청년의 손끝이 파르르 떨었다.
“그래서… 서영아, 넌… 다시 가야 되니?”
말끝이 심하게 떨렸다. 여자는 처음처럼 해맑게 웃었다. 다섯 살 어린애처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배를 내려다보며 계속 웃었다.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내 아기야, 내 아기. 이쁘지? 그런데… 나 또 어디로 가야 되는 거야?”
크게 뜬 눈으로 청년을 살폈다.
“나, 또 어디로 가야 돼? 어디로?”
여자 눈에 겁이 실렸다. 그러자 쫓기는 짐승처럼 얼굴이 단단해지며, 눈빛이 야성적으로 날카로워지더니, 한순간에 이곳이 어딘지 잊은 듯 전혀 딴 얼굴로 바뀌었다. 다시 대문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간 여자를 청년이 붙잡자, 울듯이 허공을 둘러보며 경계심에 차서 두 손을 저었다. 눈빛이 초점을 잃고 심상찮게 번쩍거렸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청년의 얼굴이 불현듯 밝게 풀어지면서 모든 걸 일시에 이해한 듯 여자를 꽉 껴안았다. ‘아냐. 그런 말이 아냐 서영아.’ 부드럽게 여자를 토닥였다.
“그랬구나, 서영아. 예쁜 아기를 가졌구나. 우리 착한 서영이가 장한 일을 했네? …아무 데도 안 가도 돼 서영아. 이젠 집에 왔잖아 그지? 또 어디 가면 안 돼. 또 가버리면 절대 안 돼 응? 내가 미안했어. 그때 널 구해 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 했어 서영아.”
청년이 뺨에 볼을 비비자, 깃이 헤진 철 지난 옷을 입은 여자가 아이처럼 목을 꼬고 웃었다. 그리고 청년을 한참 응시하더니 거친 손으로 청년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만졌다.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매일 같이 자꾸 들렸어. 여기야 서영아 어서 와! 자꾸 들렸어.”
얼굴빛이 차츰 개이더니 눈빛이 그럴 수 없이 순해지면서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런 채로 허깨비처럼 마른 청년의 어깨너머로 집과 뜰을 그리운 듯 둘러봤다.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어. 그래서 여길 찾을 수가 없었어.”
“잘했어 서영아, 이젠 됐어. 이렇게 니가 왔잖아. 씩씩한 서영이! 우리 착한 서영이.”
그렁그렁한 눈물을 떨구며 여자가 웃었다. 맑아진 눈빛으로 포근하고 따뜻한 것에 덮인 듯 비로소 안심한 표정이었다. 집달팽이처럼 커다란 가방을 멘 여자를 품고서 청년이 몇 번이나 속삭였다.
“이 집을 기억해내서 정말 고마워. 너무 보고 싶었어 서영아!”
그리고는 작은 새처럼 고단하게 야윈 얼굴을 쓸어주며 푸른 끈이 묶인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설표의 몸을 입고 시공을 넘어가 안간힘으로 여자의 환영을 끌어올리던 때의 미소가 온 얼굴에 번졌다. 더할 나위 없이 환하고 깨끗한 웃음이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얼굴표정이 쌍둥이처럼 똑같아진 두 사람에게 어머니가 노을을 받으며 다가갔다.
아득히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승은 고개를 틀었다. 모이를 주듯 울음소리가 다시 길게 뻗어왔다.
대문을 지나, 봄꽃 쏟아지던 골목과 그림 속 작은 여자가 걸터앉았던 담장을 지나, 검정개가 손바닥을 물어뜯던 흙 마당을 지나, 승은 산길로 올랐다. 우렁찬 닭소리가 이마를 간질였다.
익힌 통돼지를 엎어놓고 굿하던 집을 지나, 달개비들이 군락을 이뤘던 무너진 담을 지나 한참 더 오르니 툭 트인 하늘이었다. 꼭대기에 서자 아찔한 발밑으로 아파트 단지를 들여앉히려고 산을 반 넘게 잘라 파버린 개발지에 지하기반 공사가 한창이었다. 눈 시리게 깊은 밑바닥에서 손톱만 한 인부들이 소리 없이 오갔다.
하늘은 더없이 환했다. 이런 날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게 청명했다. 승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닭소리가 들리는 듯도 싶고 안 들리는 듯도 싶었다. 환청이었나? 분명 들었는데.
승은 앉은 자리에서 모래를 쓸어 한 줌 쥐었다. 그리고 남자답게 잘생긴 자신의 손을 활짝 펴서 한참 내려다보였다. 그런 뒤 몸을 날려 까마득한 공사장 위로 뛰어내렸다.
이런 날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게 몸이 가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