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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게 바람 소리가 났다.
“내 피가 이상하다 느낀 게 열여섯쯤이었어. 훨씬 전부터 뭔가 석연찮았지만, 내가 동성에 강하게 끌리는 걸 알아챈 게 그때였지. 하지만 걱정 없었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성 중에서 하난 감춰버리고 하나만 드러내면 됐으니까. 난 자신 있었어. 영화나 책에서 그런 일로 징징거리는 바이들을 보면 쓰레기 같았거든. 문제 해결을 간단히 본 거야.”
방 밖으로 닭이 빠르게 스쳐 가는 느낌이 들었다.
“성공할 뻔했지. 난 여자애들과도 곧잘 지냈거든.”
감빛셔츠를 입은 청년의 손을 가져다 뺨에 댔다. 가랑잎 냄새가 났다.
“대학생 때 이태원 게이 바 앞을 걷다가 골목 안에서 젊은 놈들에게 집단으로 맞고 있는 남자를 봤어. 바에 파트너를 구하러 나타난 중년 남자였지. 그런 곳에 처음 온 것 같았어.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줄무늬 양복에 붉은 꽃을 달고 뺨엔 핑크빛 화장을 하고 있더군.”
승은 픽 웃었다.
“더러운 호모라고 녀석들이 걷어찼어. 실컷 두들기곤 구둣발로 머리통을 짓밟고 웃으며 떠나버렸지. 늙은 남자가 홀로 벽을 잡고 몸부림치며 우는 걸 나는 다른 어둠 속에서 죄 보고 있었어. 바로 나의 아버지였거든.”
수족관의 물빛이 푸르스름하게 흔들렸다.
“집에서 늘 보던 평범하고 고지식한 아버지였어. 상상이나 했겠어?”
승은 공기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날 이후론 다신 보지 못했지. 그 꼴로 어디로 잠적했을까?’ 입속의 공기가 달았다. 침을 뱉고 싶었다.
“안 그래도 정체성의 줄타기로 곡예 중이던 난 단숨에 꺾였어. 칼에 맞았다면 훨씬 더 쉬웠겠지. 하지만 잘 해냈어. 진실 같은 건 개한테나 주고, 눈 똑바로 뜨고 주의 깊게 살면 된다고 작정했거든. 난 추하게 늙어서 붉은 꽃 같은 걸 달고 가슴 터지게 울고 싶지 않았어. 그뿐이었어.”
차곡차곡 접어서 청년의 귀에 담아주듯 도란도란 말했다.
“남자에 끌릴 때마다 그 추레한 게이를 떠올렸지. 아버지는 내게 살아 있는 쐐기였어.”
승은 물끄러미 벽을 봤다.
“헌데 이번에 널 기다리면서, 떳떳하게 양성을 즐기고 싶다고 처음으로 깨달았어. 내 오랜 소원은 그것이었던 것 같아, 구속을 푸는 것.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일 너를 연인으로 만들겠어. 니가 찾는 여자 따윈 이 세상에 더 없어. 넌 현실로 돌아와서 날 보게 될 거야.”
청년이 갑자기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더니 도로 감았다. 가슴께가 들썩이고 손등의 핏줄도 도드라져 깨워 일으키려다가 힘들어 보여서 입술에 물만 적셔줬다. 이 맑은 눈과 뺨, 수려한 오월나무처럼 눈부신 남자가 있는데 두려워 포기할 게 뭔가. 마음 언저리가 어슴푸레 포근해졌다.
“사랑을 누리려 하지 않고 버릴 생각만 했어. 방해물을 다 꺾어 짓밟고 가려고만 했거든. 네가 히말라야로 떠날 때까지도, 널 빼앗고 버린 다음에 더 강해지겠다고 결심했었어, 바보였지?”
전에 없던 희망이 불 켠 집처럼 가슴에 들어와 떨림을 일으켰다.
‘널 만난 게 행운인 걸 번개에 맞듯 깨달았어. 길이 안 보이면 그냥 가면 된댔지? 난 너에게 갈 거야.’ 안고 싶은 충동을 견디며 청년의 따뜻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널 원 없이 사랑하고 생을 꽉 안겠어. 부끄러울 건 처음부터 없었지. 난 바보였어.”
승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여기저기 걷다가 인적이 끊긴 담벼락 아래서 통곡했다. 그는 청년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청년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더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잠든 청년에게 건네준 말들이 청년의 내부에서 싹 틔우고 자라서 그를 받아들이길 간절히 바랬다. 초조한 이마를 담벼락에 비비며 승은 불안에 떨었다.
“널 못 갖게 된다면 난 어떤 괴물이 될까? 다시 껍질로 살 자신이 없어.”
웃옷을 벗어 머리에 쓰고 승은 온몸이 흠뻑 젖도록 홀로 통곡했다.
석양 무렵 산길을 걷던 승은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주위가 너무 붉어서 세상이 열을 앓는 것 같았다. 이상한 느낌에 청년의 집으로 다시 내려갔다. 어쩐지 급해져서 서둘러 가다가 윗길에서 구비 진 돌계단을 내려가며 청년의 집을 보니, 늦가을 분꽃이 만발한 화단 가에 청년의 어머니가 물 호스를 들고 서 있었다.
골목바닥으로 내려섰을 때, 그 보다 몇 발 앞서서 한 여자가 대문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푸른 줄로 머리를 묶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임신한 여자였다. 집달팽이처럼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승은 급히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