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어느덧 가을. 사람도 온기도 없는 청년의 집은 쓸쓸했다. 승은 먼지 낀 대청마루에 누우며 잠깐만이라도 잘 수 있길 바랐다.
꿈일까. 지저분한 등산화부터 산발한 머리까지, 승은 눈을 비비며 앞에 선 사람을 훑어봤다. 소리도 없이 마루 끝에 나타난 청년은 눈알이 빨갛고 형형했다.
놀라서 일어나 앉는 승을 처음 본 사람처럼 내려다보다가, 청년은 마당을 질러갔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더 보이지 않았다. 승은 마루 기둥에 기대어 해를 봤다. 어디선가 닭이 홰를 치며 나타나 수다스럽게 주인을 반길 것만 같았다. 청년이 없을 때면 통 먹지를 않아 초라해지던 꼬리털이며 방정맞고 부산스런 발놀림들이 눈에 선했다. 자신을 불러주지 않아 상심한 닭이 깃으로 칠 때마다 열리던 방문은 꼭 닫힌 채, 집은 괴괴했다.
마당에 해 그늘이 깔린 뒤 건너갔더니, 청년은 자고 있었다. 눈자위가 패이고 새까만 얼굴과 팔에 생채기투성이였다. 링거를 구해다 맞히고 싶었지만 화를 낼까 봐 망설여졌다. 그의 연락을 받은 어머니가 황망히 들어서자, 승은 서영의 얼굴이 실린 포스터를 대청구석에 놓고 돌아섰다.
며칠을 연달아 청년은 열과 한기를 함께 앓았다. 병원을 원치 않아 파견 간호원이 해열제를 놓아주고 갔지만 거의 눈을 뜨지 못했다. 반점으로 얼룩진 팔다리 선이 살이 다 빠져서 가팔랐다. 마당 한켠에서 기척만 살피고 돌아서곤 하던 승은, 상태를 보러 가끔 들러도 되겠냐고 어머니께 어렵사리 물었다. 시름에 잠긴 그녀가 끄덕였다.
일주일이 지나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밤낮으로 곁을 지키던 어머니가 잠깐 가게로 나갔다. 그제야 옆에 앉는 승에게 청년이 나가라고 손짓했다. 말없이 방바닥에 시선을 떨구니 청년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승은 방을 나서서 마당에 서 있다가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다. 온 골목을 걷다가 다시 돌아갔다. 청년은 깊이 자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색깔이 아주 예쁜 감이 나왔더라구. 단감을 좋아한다면서?”
승은 오늘따라 자꾸 눈을 감는 청년이 깨어 있도록 말을 시켰다. 밤의 숙면을 위해서였다. 보름 넘도록 청년은 기운을 못 차렸다. 히말라야에서 감당 못할 만큼 마음을 다친 모양이었다.
“그쪽에서 한 번쯤 조장을 봤겠군. 부자가 죽으면 승려를 불러다 경을 외우게 하고, 야산의 타스들이 날아와 시체를 뜯어먹잖아.”
승이 말을 걸어도 청년은 더는 거부하지 않았다.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만의 깊은 심연에 잠겨 있었다. 몸보다 마음에 상처가 깊은 듯, 눈빛이 현실로 돌아오지 않고 먼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타스는 시체를 먹고, 어떤 꽃들은 입이 상처로 문드러지면서도 독벌레를 녹여 먹어.”
검지로 청년의 앞머리를 걷어 올렸다. 잠들어가던 청년이 이마를 틀었다. 울컥 서러웠다.
“산들이 밤마다 걸어서 바다로 들어가던 때가 있었다고 해. 그러면 그 산의 식물만을 기다려서 뽑아 먹었던 물고기도 있었다더군. 우주 만물이 온전히 살아 있던 때에는.”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듯해서 어머니가 돌아왔나 내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마당을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며, 승은 무타이 천을 생각했다. 몽골 쪽 히말라야 삼천 미터 지점에서 발견했던 지팡이 모양의 차가운 시내였다. 그때 동행했던 각국의 여행객들이 한꺼번에 환호성을 터트리며 달려가던 와중에, 승은 왜 그랬는지 살아 있음을 저주했었다. 모를 일이었다. 물이 너무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흙냄새에 섞인 물 냄새가 너무 달콤하게 코에 풍겨왔을 때, 마음 바닥으로부터 불끈 그 냇물을 죽이고 싶다는 살의를 느꼈었다. 너무 강렬한 살의여서 돌발적 감정이라기엔 등골이 오싹했었다. 흠 없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였을까.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세상엔 줄이 많아. 저 무거운 공기 속에도 무수한 줄이 있거든.”
땀을 닦아주다가 손이 청년의 입술에 닿았다. 발끝까지 아득하게 저렸다.
“줄은 이상해. 투명한 줄일수록 이상해. 한 번 목에 감기면 도무지 풀어지지 않아.”
단내나는 숨을 몰아쉬던 청년이 눈을 떴다. 그러나 맥을 놓고 다시 잠들었다. 약 먹을 시간을 놓치면서 계속 잤고 가끔 흐느꼈다. 여자를 찾다가 실패하고 어느 때보다 절망에 빠진 듯 잠속에서 흐느낄 때마다, 승은 벽의 흰 야수 그림을 올려다봤다.
“난 말이지. 내일 이혼이란 걸 하거든. 완전히 혼자가 돼. 근데.”
승은 약봉지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거든.”
청년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잠든 얼굴이 모처럼 평온해 보였다. ‘이참에 정색을 하고 봤더니 세상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더군.’ 승은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어젠 길을 걷다가 내게 그림자가 있다는 걸 몇 년 만에 깨달았어. 그런 식이야. 자신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잊고 살기 십상이잖아.”
닭털 몇 개가 책상 위에서 바르르 떨었다. 승이 마당에서 주워다 놓은 것들이었다.
“너처럼, 어디서 날 부르는 소리가 없는지 귀가 기울여져 자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