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넋이 나간 승을 제쳐두고, 사진집은 광호가 최종 원고를 넘긴 지 닷새 만에 인쇄돼 나왔다. 출판기념 형식으로 열린 전시회에서 인간의 표정을 가진 풍경과 사물들은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화랑엔 사람들이 몰리고 책도 많이 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승은 청담동 숙소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청년이 국내를 떠난 지 삼 주째였다. 울어서 눈가가 짓무른 청년의 어머니는, 가게를 남에게 맡기고 마루에 앉아 아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집을 떠난 아들을 수십 년간 기다리며 유리창만 바라보던 어떤 어머니가 늙어 죽은 뒤에 다른 가족이 그 집으로 이사를 왔는데, 날이 궂거나 비가 오면 그 늙은 여자의 수심에 찬 얼굴이 유리창에 비친다는 괴담이었다. 그걸 듣고 밤마다 커튼으로 창을 가리고 공부하던 심약한 시절이 있었다고 승은 피곤하게 웃었다.
숙소 골목 너머 큰길은 자동차와 가게의 조명들로 빛의 강을 이루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승은 끊지 않고 들었다.
“은지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이상한 여자군. 그만하면 딴 남자를 구할 때가 됐는데.”
“그런 말 말아요. 우린 부부예요. 난 당신 절대 포기 안 해요.”
아내는 그만 돌아오라고 했다. 당신과 잠자리를 했을 때, 남자끼리 사랑할 때도 이렇게 뜨겁게 애무하느냐고 물은 건 비웃음이 아니고 질투 때문이었고, 황홀해서 정신이 나간 실수였다고 했다. 오래 참다 용기를 냈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아내는 그 말 때문에 승이 집을 나온 걸로 믿는 모양이지만, 승에겐 결국 집을 빠져나올 준비된 핑곗거리였을 뿐이었다. 그날 승을 못 견디게 한 기억에 대해 아내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질투 때문이었어요. 난 당신 사랑해요.”
아내가 그의 귀에 그런 말을 속삭인 것도 승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일본인 타쿠 때문이었다. 패션일로 한국에 왔다가 눌러앉은 타쿠는 그쪽 일에서 지명도가 쌓이자 커밍아웃을 한 뒤, 승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던 게이였다. 남자엔 관심 없다고 쳐내도 끄떡없었다. 이혼하고 자기와 살자고 애원했다. 어느 날 바깥 일로 잔뜩 술을 마시고 온 승은, 아내가 타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자 대답했다. ‘난 양성애자야. 놀랐니? 하지만 어른이 된 뒤론 그 취향을 버렸단다.’ 정신을 잃을 만큼 취중이었지만, 본질을 흐리려는 방어였는지도 몰랐다.
“내가 그때 대답했잖아요. 당신이 양성애를 증오하고, 남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까 상관없다구.”
승은 묵묵히 들었다.
“날 믿죠? 우린 잘하고 있었잖아요.”
허락 없이 내 앞에 나타나면 돈을 처발라 뜯어고친 곱상한 얼굴을 면도칼로 그어주겠다는 협박을 정말로 믿었던지 핸드폰에 문자만 넣던 아내는, 작심한 듯 말이 많았다.
졸업 후 방만한 섹스에 빠져 살던 승이 절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던 그녀와 지속적인 잠자리를 가졌던 건 여자들을 갈아치우기에 지쳤을 때인 듯했다. 그의 삶에 결코 없으리라 여겼던 결혼까지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반듯한 약국과 집과 규칙적인 잠자리를 모두 제공하고 귀여운 은지까지 안겨준 아내는 그가 집을 떠날 때까지 꽤 견딜만한 세월을 선물했고, 그는 길바닥에 뿌렸을 섹스를 총동원해 보답했었다.
“다시 약국을 열고 우리 셋이 즐겁게 살면, 당신의 흔들리는 성도 분명하게 자리 잡을 거예요. 난 믿어요.”
전화목소리에 어느덧 애교가 실려 있었다. 그쯤에서 승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만하면 됐다는 생각이었다.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쓸었다. 청년이 그리웠다.
청년만큼 치명적인 상대가 없어서 날 다스릴 수 있었을까? 성인이 된 후 남성과의 섹스는 통틀어 세 번이었다. 그것도 관계 이전에 욕망으로 괴로웠지, 막상 교접 당시엔 거울로 생생히 비춰보는 듯한 자각 때문에 몰입되지 않았다. 욕망이 참기 어렵게 거세질 때는 혼자 옷을 입고 있을 때였다. 십분 혹은 이십 분 정도 승은 옷장 문을 열어놓고, 깨끗한 옷가지 속에서 상상만으로 일을 치르는 살 떨리는 쾌락에 몸을 맡기곤 했다. 결코 바깥세상에선 남자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숙소로 남자를 들인 일도 없었다. 위험에 대한 철저한 선 긋기였다. 그게 보람 있는 일이었을까.
청년이 그리웠다. 닭을 죽인 날 이후 못 만났던 청년은 그 뒤 다른 때보다 큰돈을 마련해 히말라야로 떠났다고 했다. 소식도 없고 기약도 없다는데, 자신은 깃발처럼 그쪽으로만 몸을 기울인 채 무얼 먹고 어디서 잤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리움과 더불어, 불길에 책과 노트들을 태우던 허깨비 같던 모습이 매시간 마음에 걸렸다.
승은 숙소의 불을 다 껐다. 불빛이 너무 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