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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디지? 덜 깨인 눈을 비비는데 누구 건지 모를 피가 손등에 묻었고, 속이 메슥거렸다. 한참 만에 승은 익숙한 골목에 주저앉은 걸 깨닫고 이런 제길, 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준기가 데려왔던 40대 남자와, 뒤늦게 조인한 콜렉터라는 사업가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얘기가 오가다가 무슨 말에선가 벌떡 일어나서 처음 만난 그 콜렉터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긴 기억이 났다. 전시회 얘기는 입도 떼지 않고 이태원 게이 바에 대해 지저분한 외설만 늘어놓던 능글능글한 작자였다. 승의 어깨를 함부로 툭툭 치며 시시덕댔고, 먼저 왔던 남자까지 지독한 자세로 게이 흉내를 내던 기억에 이르자 욕지기가 났다. 그런데도 질리게 이어졌던 더러운 얘기들 중 어느 대목에서 화가 치밀었는지는 어처구니없게도 기억에 없었다.
아직 새벽이었다. 후들거리며 청년의 집까지 걸어갔다. 잠긴 대문에 기댔다가 힘을 쥐어짜 담을 넘었다. 몇 번씩 해본 짓이어서 올라타긴 쉬웠지만, 안쪽 마당으론 무지막지하게 굴러떨어졌다. 닭대가리가 뛰쳐나올 법한데 조용했다. 묽은 어둠에 싸인 청년의 방을 보다가, 집 뒤로 돌아가 땅바닥에 누워버렸다.
꾸르륵 소리에 눈을 뜬 승은 기겁했다. 그의 품에 푹 안겨서 자고 있던 닭도 놀라 퍼덕거렸다. 승의 입안에 닭털이 물려 있고 어느새 훤한 아침이었다.
주먹으로 닭을 쳐낸 뒤 집안의 기척을 살피다가, 청년의 어머니가 가게로 나갔다 싶을 때 뒤뜰을 벗어났다. 뭔가 타는 냄새가 나더니, 마당에 불을 피워놓은 청년이 보였다.
“책을 왜 태워?”
종이를 찢느라 못 알아듣는 청년을 물끄러미 봤다. 얼마 사이에 몹시 말라서 큰 키가 휘어 있었다. 저 평화로운 멋진 몸이 서영을 살리려고 긴 팔을 휘저으며 설표에게 달려들었겠지.
태울 거리를 집으려던 청년이 승을 발견했다. 말없이 마주 봤다. 청년이 옷가지 몇 개를 불에 넣고 노트와 시디들도 태워 나갔다. 꽤 많은 양이었다. 지랄 같군. 승은 어제나 그제쯤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팔짱을 꼈다. 불길은 높고 낮게 펄럭였고, 닭도 와서 멍하니 불을 구경했다. 품까지 파고들어 와 자다니, 이젠 마주쳐도 울지도 않는 녀석을 보다가 승은 생각난 듯 옆구리를 뒤졌다. 이태원에서 개판으로 싸우고 택시에 실려 이 동네까지 들어온 와중에도 착실히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여기 드나들었던 봄날의 기념품.”
어색해서 던져본 멘트에 청년은 무심히 불만 봤다. 그 발치에 사진을 날렸다. 면도칼로 오린 듯 볏이 거세된 거대수탉의 대머리사진이었다.
“그건 장난 좀 쳐 본 거고, 이걸 좀 봐.”
크게 뽑은 흑백사진에 꽉 들어찬 닭이, 엄청난 카리스마를 뿜으며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근래에 드물게 썩 잘 된 사진이었다.
“안 봐?”
청년은 불길만 높였다. 뭔가 궁리에 잠긴 듯했다. 승은 푸르스름한 방안을 돌아봤다.
“설표가 아니면 다 필요 없단 말이지?”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짓은 말자고 타일러도 승의 감정은 또다시 봉합이 터져나가며 요동쳤다. 저 무구하고 매정한 몸 앞에서 열패감을 느낄 때마다, 다잡았던 마음이 무너진 게 몇 번인가. 빈정대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에서 와글거렸다.
“그렇게 간곡하게 지키면, 여자가 늙어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여한은 없겠군!”
어디선가 허기에 지쳐 부르면 바람 속을 달려가는 남자. 바위틈의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달리고 달려서 기어코 여자를 찾아내 온 정성으로 기운을 불어주는 남자. 부르는 소리조차 없을 땐 눈물과 웃음을 벽에 그려 넣으며 그리움을 달래는 남자의 여자는, 입술을 조금 벌린 채 흰 옷자락을 흔들며 청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기억해내지 못해서 유랑하는 여자의 남자는, 뚫어지게 그 작은 여자를 보고 있었다.
“불가능한 만남이지. 말해 봐. 솔직히 섹슈얼 엑스터시를 즐기는 거지? 네 묘한 호흡 질을 두 번이나 봤어.”
청년이 돌아보자 승의 가슴이 철렁했다.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에 두 눈이 날 서 있었다.
“아주 에로틱했어. 내 몸도 열탕에 빠진 듯 후끈했지.”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감정은 이미 격랑이었다.
“사교의 교주 같았단 말이거든. 불순하지만 감동적이었어.”
왜 그런지 다른 때와 다르게 곧 바스러질 허깨비처럼 불 앞에 선 모습을 보자, 승의 머릿속에 폭풍이 쳤다.
“널 사랑해!”
미처 다듬지 못한 말이었다.
“널 사랑해. 모르는 척하지 마. 미치게 사랑해!”
심장을 눌렀다. 널 안고 싶어. 당장 으스러지게 안고 만지고 싶어! 이젠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인식이 승을 캄캄한 바닥으로 걷어찼다.
“바이섹슈얼, 양성 성욕자, 길바닥에서 사랑을 구걸하던 내 애비처럼 나도 그런 인간이라구! 지금껏 잘 참아왔는데 니가 날 후벼 파!”
청년의 눈빛이 좁고 날카로워졌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승은 집이 떠나가게 소리쳤다.
“몰랐다고 말하지 마. 줄곧 개처럼 헐떡거리며 널 원했잖아!”
그리고 달려들어 청년을 밀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