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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약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쌍생아처럼 생각과 느낌이 일치했어요. 한쪽이 불행하면, 다른 쪽도 평화롭지 못했죠. 서영이의 존재감은 스러진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형은 서영이가 굶주리거나 아프면 바로 느낀대요. 정말일 겁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서로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한쪽의 기억이 닫혀있지만, 둘은 한 몸처럼 가깝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몸을 바꾸는군.”
승의 눈빛이 심술궂게 꼬였다. 긴 얘기로 인해 멀고 깊어진 눈빛으로 동생이 쳐다봤다.
“형은 스스로 설표가 되어 여자를 찾아간다구요. 하지만 한갓 망상이라면? 살아 있대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정착했거나 딴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겠죠. 여자 혼자 떠돌 만큼 히말라야가 녹록한 곳인가.”
입 끝을 비틀며 사진을 흘겨보는 승의 이마에 동생의 눈길이 느껴졌다. 낮게, 울음 끝처럼 숨소리가 떨리더니 침묵이 왔다.
“딱 한 번 제보가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서영을 찾는데 동원됐던 티베트 남자가, 설표 얘기를 하며 떠도는 외국여자의 소문을 곡물시장에서 들었다구요. 몇 명이서 소문이 흘러나온 민가를 찾아냈는데, 얼굴사진을 보더니 맞다고 했대요. 피로에 지친 서영이가 이틀 밤을 그 민가에서 묵고 떠난 지 이미 삼 개월이나 지난 뒤의 제보였죠.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가 억지로 입을 떼면 설표 얘기만 하던 여자였다구요. 그 외엔 잘 먹지도, 잘 말하지도 못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답니다.”
거리로 나온 승은 이태원으로 거칠게 차를 몰았다. 이제 막 가로등이 켜진 거리에 유난히 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카페 뒤뜰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 위스키를 시켰다. 웨스턴 풍으로 요란하게 꾸민 실내 복판엔 로프를 감아 쥐고 곧 뛰쳐나갈 듯 말 엉덩이를 후려치는 카우보이 상이 있었다. 조금 전 테헤란로의 사무실과는 백만 년쯤 떨어진 듯한 풍경이었다.
― 딱 한 번의 그 제보가 2년 전이었습니다. 형이 그토록 사력을 다해서 지키는 동안, 서영인 집으로 오는 길을 찾아낼 거예요. 틀림없이 해낼 겁니다.
형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혼자 나와 산다는 그의 어조는, 형이란 단어를 말할 때 몹시 부드러웠다.
― 예쁜 여자예요. 그녀가 돌아오면, 형의 삶은 다시 진행될 겁니다.
승은 술을 내려다봤다. 설표의 혼을 빌려 시공을 뚫고 간 청년의 눈앞에 여자는 정말 살아 있었을까. 질문은 부질없었다. 기이한 자세로 흘러가서 지극하게 위무하던 순간의 두 사람은, 두 사람의 교감은, 승의 심장이 조일 만큼 실재적이고 뚜렷했었다.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충동을 견디며 승은 눈을 감았다. 석양에 피어난 구름들. 붉은 피를 뿜는 흰 짐승. 애처롭게 마주 선 자그만 여자. …설표는 죽어서 한밤의 검은 히말라야 위로 꽃처럼 떠오르고, 붕대로 머리를 감은 여자는 아이처럼 설표를 부르며 산과 산 사이를 누비는 모습들을 더듬어가다가, 등을 치는 손길을 느꼈다. 오늘 약속을 주선했던 준기가 서 있었다.
“서로 기억하시죠? 꽤 인상적인 만남이었잖아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40대 남자가 웃으며 준기를 따라 합석하자 웨이터가 왔다. 그새 실내는 꽤 북적거렸다.
“사진이 늘 좋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찍을 수 있는지, 새 전시회도 기대가 커요.”
“감사합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요즘은 모두들 꽤 찍습디다. 블로그만 살펴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알뜰히도 찍어오는 사진들 중에 눈에 번쩍 띄는 게 많죠. 그런데 2프로를 더 채우는 사람은 드물단 말이죠.”
“모두들 그림도 잘 그려, 글과 노래도 기차게 잘 만들어, 프로와 아마의 경계가 무너져간다니까요.”
준기가 맞장구쳤다.
“그런데도 그 2프로를 못 채워서 나 같은 사람은 허기를 느끼거든.”
“안목이 높으시니까요.”
“후후. 눈은 좀 높지.”
승은 물을 마셨다. 이런 자리는 십 분도 못 되어 권태롭지만, 본능적으로 긴장을 풀지 않았다. 약속을 잡기가 어렵지, 잘만 풀리면 몇 시간 만에 몇 달치의 생활비를 벌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번엔 몇 점?”
“마흔일곱 작품입니다”
“꽉 차겠군요. 볼거리가 풍성해서 눈이 즐겁겠습니다. 몽골 쪽인가요?”
“히말라야 전역이라고 봐야죠. 나라로 치면 5개국. 인물도 있지만 하늘 중심이니까 경계 지을 필요는 없겠구요.”
“좋은 작품 좀 주십쇼. 이따가 다리 놔 드릴 분도 계시구요. 그래서 또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거 아닙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얘기는 그렇게 진행되지만, 준기와 광호가 벌써 몇몇 콜렉터에게 포트폴리오를 보인 걸로 알고 있었다. 거래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고 무던히 영악하게 굴었지만, 승은 마케팅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 광호가 준 스케줄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준기를 따라가 각종 매체에 과장을 섞어서 인터뷰했다. 살아남아야 하는 직업이라고 못 박은 후론 메모지만 훑어보면 라디오건 잡지건 여행지의 에피소드들이 줄줄 풀려나왔다. 말발도 훈련이 필요했다. 사진작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광호 덕에 빠른 속도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행운이었다. 예술이 먼저고 돈은 따라온다는 말을 승은 믿지 않았다. 적어도 그게 정답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