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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후, 전시회 리플릿 시안을 들고 승은 테헤란로로 나갔다. 전화로 약속했던 청년의 동생이 제약회사 로비에서 웃으며 맞아주었다. 악수를 나눈 뒤 작은 사무실로 안내됐다.
“어머니께서 사진들을 챙겨주셨어요. 평범한 건 안 될 거라고 제가 말씀드렸거든요. 강서영 씨 사진을 전시에 보이기로 한 뒤, 적극적이세요.”
청년과 한 형제라고 믿기 어려울 만치 판이하게 다른 호남의 인상이었다. 동생은 봉투에서 사진 두 장과 전단을 꺼냈다.
히말라야 웅카 산을 배경으로 찍은 여자 사진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다른 손으론 치맛자락을 잡고 활짝 웃는 모습이 눈이 시원하게 상큼했다. 날카로운 스카이라인 위로 승이 즐겨 찍었던 구름들이 만개했고, 수놓은 치마 아래 면바지와 부츠 차림이 영락없이 그 지역 처녀의 건강한 모습이었다. 긴 뒷머리를 푸른색 머리띠로 묶고 있었다.
“형이 아끼는 사진이에요. 또 이건 형 방에 놓인 건데, 히말라야로 떠나기 직전에 찍은 겁니다. 제 의견으론 푸른 머리띠 사진이 전시에 어울릴 듯합니다만.”
승은 가져온 시안 위에 사진을 올려봤다. 프린트된 그의 사진 세 장과 함께, 여자의 사진이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려들었다. 긴장했던 동생이 웃었다. 그리고 전시회 성격을 묻고, 원하는 형태로 스캔해서 이메일로 보내겠다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신중한 손놀림이었다.
“실례지만 형님 방안의 그림들은 뭡니까?”
아. 은행원이 웃었다.
“설표 말입니까?”
“역시 그렇군요. 거의가 하얗기만 해서 긴가민가했어요.”
“점박이 무늬들이 없죠. 일종의 변형인데 언제부턴가 그렇게 변하더군요.”
“설마 형이 설표를 만났던 건 아니죠? 거의 멸종되어 볼 수도 없으니까.”
“분포지역이 적고 밀렵이 많아서 위기라죠. 고지대에 흩어져 사니까 먹이도 부족하고 때론 며칠씩 물로 연명하다 죽는다더군요. 그러면서도 주로 혼자라죠. 야수다운 야수죠.”
승은 좀 혼란스럽게 얘기를 들었다. 동생 역시 꽤 괴팍한 수재였다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감상적인 남자가 아닌가 생각했을 것이다.
소문으론 차 사고가 났다던데요. 승은 청년의 흉터를 떠올리며 물었다.
“글쎄요. 복잡한 얘깁니다.”
“제가 도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동생이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서영이가, 아, 전 그렇게 불러요, 서영이가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했어요.”
생각을 좇더니 봉투에서 아까와 다른 사진 몇 장을 꺼냈다.
“특히 설표를 사랑했죠.”
브이 자로 손가락을 세운 풀밭 위의 어린 소녀였다. 발치에 튀어 오를 듯한 설표의 실사출력물을 판넬로 세워놓고 자랑스레 웃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벽의 그림과 느낌이 흡사했다. 훌쩍 어른이 되어 히말라야의 설산이나 모닥불을 피운 야영지에서 찍은 사진들도 모조리 설표 사진과 함께였다.
“태어날 때부터 머릿속에 뭘 담아가지고 나오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서영인 어려서부터 설표에 관심이 많았어요. 나중에 설표에게 가야 한다며 눈 속에서 며칠씩 밤새는 연습도 했고, 공복도 끈질기게 참던 희한한 애였죠. 풀숲에 가면 독벌레가 있건 말건, 꽃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어버렸구요. 형과 저, 서영인 함께 자랐어요. 제가 유학 가기 전까진 셋이서 근력훈련 한답시고 거친 산도 많이 탔었죠.”
칸막이벽 뒤로 사람들이 오가는 사무실에서 듣기엔 어딘가 아득한 얘기였다.
“여행자가 설표를 만나서 사고를 당할 수 있을까요?”
“여행자가 아니었습니다. 서영인 십 대부터 티베트 지역을 드나들었어요. 대학에 가선 몇 개월씩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머물렀구요. 설표 애호가로 유대를 맺어온 여러 나라 팀들과 특별히 조인된 연구탐사였습니다. 각국 대학의 생태학 전공자와 촬영 팀과 다큐작가들이 속한 팀에 합류했는데 경험이 풍부했죠. 설표를 만나기가 99퍼센트는 불가능하다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요행이랄까, 두 번 실패에 세 번째 먼 거리지만 발견됐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행에서 뜻밖의 경로로 부닥쳤는데, 불행한 조우였죠.”
동생은 사진을 매만졌다. 미간을 좁히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 맹수에 관심을 가지면 위험하죠. 더구나 그놈은,”
“고독한 생리를 가진 야성이죠. 방해를 받으면 사나워지는 건 당연하구요. 수 미터를 가볍게 뛰어오르는 강한 짐승 아닙니까.”
승이 대신 답했다. 동생이 의외인 듯 가만히 쳐다보다가 끄덕였다.
“머릿속이 색색 구슬꾸러미 같달까, 해적선을 삼키는 바닷말이나 사막의 야광벌레들을 신나게 얘기하다가도 서영인 꼭 설표로 끝냈어요. 어른이 되고 부턴 그쪽 사람이 된 듯했죠. 티베트어도 잘 했구요.”
그러면서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를 생각할 땐 이런 표정을 짓게 되는 모양이었다. 무뚝뚝한 슈퍼 여자조차도 그녀 얘기를 할 땐 웃음기를 보였던 생각이 났다.
“그렇게 힘들게 나간 탐사에 실패하고 모두들 하산하는 길에, 뜻밖의 소식을 접한 겁니다. 설표가 인근 산중에서 살해되는 중이라구요. 그리고 몇 시간 뒤, 밀렵꾼에게 총상을 입은 설표를 본 겁니다.”
“불가능한 얘기군요. 설표가 그런 만만한 동물은 아니죠. 뭔가 차용된 얘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