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얼마나 지났는지, 눈을 뜨니 이번엔 청년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문이 활짝 열렸다. 승은 손바닥으로 빛을 가렸다.
“처음엔 서영이가 보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청년이 또박또박 말했다.
“첫날, 마당에 서 계신 모습을 보구요.”
책상으로 가서 노트를 집어든 청년은 여행 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왜 자꾸 찾아오시는지 모르지만, 이제 그만 오십시오. 제가 불편합니다.”
“아냐. 할 얘기가 있어.”
졸음이 미친 듯 몰려왔다.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몸은 춥고 머리는 뜨겁고 구역질 나고 졸렸다. 깨어나려고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치는 승을 보고, 청년이 가방을 놓더니 책상다리에 기대앉았다.
“출국하나?”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세요. 시골에 갑니다.”
“나도 갈까.”
청년이 뜨악하게 그를 봤다. 승은 입 끝을 비틀고 자조했다.
“내 몰골이 엉망이군. 얼마나 있을 건데?”
“…”
“입속에 가시가 박힌 물고기 봤나? 조금 전에 그런 꿈을 꿨어. 저 빌어먹을 그림들 때문이겠지. 사람 얼굴을 한 기분 나쁜 그림.”
청년의 모습은 기괴한 포즈로 여자를 찾아서 멀고 먼 곳을 달리던 격정적 움직임이 가시고 맑았다. 자신에게 말문을 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눈을 맞출수록 살아나는 불안정한 욕망에 승은 몹시 당황했다. 피가 간지러웠다. 와중에도 수면제를 삼킨 듯 졸음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아까 이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처절하고 간곡한 숨소리를 들었어. 지독하더군… 저 여자와 영적으로 함께라면, 난 가시박이 물고기가 동행인가? 제 가시로 제 살을 파먹는 내 속은 늘 지옥이거든.”
손을 내밀자 청년의 옷깃이 잡혔다. 청년이 놀라 피했다. 승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저히 주체하기 힘든 욕망을 누르려니, 신열이 끓어 한참을 웅얼거렸다.
“날 좀 봐 줘. 힘들어.”
“네?”
“도와달라구. 내가 너를 지나갈 수 있게 도와줘!”
청년이 의아한 눈으로 말갛게 쳐다봤다.
“널… 피해 갈 수가 없어. 널 지나가야겠어.”
하염없이 아름답고 서늘한 눈을 보려니, 설움이 치밀었다. 힘들어. 더는 못 견디겠어. 말들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고 승은 방을 뛰쳐나갔다. 이 집에 들렀다가 곧바로 청담동으로 되돌아가려고 골목에 세워뒀던 차 문을 열었다.
죽을 것 같아.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핸들을 쥔 채 정신없이 앉아 있다가 차를 몰았다. 골목을 빠져나가며 불쑥 나타난 트럭을 피하다가, 충동적으로 액셀을 힘껏 밟아 저 앞의 축대를 왕창 받아버렸다.
다리를 절며 구석의 정수기에서 물을 마신 승은 응급실을 나섰다. 청담동에 도착하자마자 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 약속 못 지키겠다. 피곤해.”
“한 시간이면 단골 봐주고 갈 수 있는데, 배달시켜 같이 식사할래요? 배고파요.”
“혼자 해. 난 잘래.”
“그럼 뭐 좀 먹고 자요. 술 말구요. 네?”
전화를 끊고 숙소 창밖을 봤다. 건너편 찻집에 걸린 꽃들이 이른 더위에 지쳐 보였다. 꽃이 시드는 건 쫓아오는 시간에 밀려서이지 제 수명을 다해서가 아니지. 도미노가 엎어지듯 시간이 정연하고 너무 빨랐다. 승은 응급처치 받은 목 보호대를 풀어버리고 침대에 쓰러졌다.
…이즈음 늘 그렇듯 물속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투명해질 때까지 떠다니다 해파리처럼 쓸려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줄곧 검은 덩어리에 붙잡혔고, 어깨를 물어 뜯겨 피가 흘렀다. 토할 것 같은 거부감으로 가시를 빼려고 버둥거렸다.
안간힘을 쓰다 깨어난 승은 소스라쳤다. 시커먼 물체가 곁에 붙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유리가 울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승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유리의 우는 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또 아팠어요?”
“넌 왜 우니?”
“며칠 새 왜 그렇게 말랐냐구요. 딴 사람이 누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러면서 얼굴을 쓰다듬었다. 습기 없이 따뜻한 손길이었다. 한참 얼굴을 맡겼다.
“많이많이 자다가 해파리처럼 사라지고 싶었어.”
“시니컬한 당신이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해요.”
유리가 그의 눈꺼풀을 문질렀다.
“당신을 이렇게 잘 느낀 때가 없었어요. 모르겠어. 가슴 안으로 통째로 들어와 버린 것 같아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유리가 곁에 누우며 머리를 기댔다. 승은 움찔했다. 축대에 받친 차는 앞 범퍼가 나갔을 뿐 멀쩡했지만, 충격을 받은 몸 어딘가가 뻐근했다.
“무거워.”
“싫어요.”
“무거워서 그래. 너무 무거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