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격한 호흡을 좇느라 승의 신경은 곤두섰지만, 청년은 시간을 훌쩍 넘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동굴바닥의 안개처럼 모호하고 낯선 시간이 흘렀다. 청년의 얼굴은 여전히 캄캄했다.
흘낏 던졌던 시선을 다시 바닥으로 깐 승은, 긴 기다림 끝에 어느 순간 청년이 딴 세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엇비낀 시야에 피투성이 벽 그림이 들어왔다. 고통으로 팽창된 짐승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기운이 쭉 빠졌다.
끄윽.
목덜미를 찌르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돌아보면 청년의 기가 교란돼 다치거나 자세를 풀고 쓰러질 것 같았다. 청년에게서 짐승의 털 냄새가 나는 건 과민한 신경 탓일 것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아주 많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 사이에 승의 내부에서는 뜨겁고 쓸쓸한 감정들이 몰려왔다가 알 수 없이 흩어지곤 했다.
괴성을 지르며 청년이 등을 구부렸다. 눈에서 힘을 빼고 훔쳐보니, 청년은 고개를 말아서 제 가슴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바닥을 짚은 두 팔이 격렬하게 떨었다. 허리가 불에 타는 가죽처럼 위태롭게 조여들면서 신음이 거칠어졌다. 너무 극한으로 뒤틀리는 몸체가 위험해 깨우고 싶었지만, 만지면 물어뜯을 듯 힘이 들어간 상태로 청년은 무엇엔가 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창백한 이마에 힘줄이 돋고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점진적으로 기이해지는 동작에 승은 완전히 압도되었다. 청년의 몸체가 벽의 짐승들처럼 탄력 있게 늘어나고 강해지고 근육들이 뭉치더니, 오른손이 앞발의 각도로 허공을 저으며 뭔가를 처절하게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 힘든 자세에서 서서히 돌아가던 눈의 흰자위가 눈동자를 완전히 삼켜버릴 즈음, 무릎 위에 세웠던 상체가 뒤로 푹 꺾였다.
꺾인 몸이 승의 팔을 깔아뭉갰다. 얼음처럼 찬 기운에 놀라 청년을 밀치고 구석으로 피했다. 목을 비틀며 몇 번이나 끔찍한 신음을 토해내던 청년이 쓰러졌다. 기절이 아니었다. 청년의 의식은 어느 때보다 또렷이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 내부의 어떤 움직임이 레이저 광선처럼 확연하게 느껴졌다. 진행은 오래 계속됐다.
초조하게 엿보던 승은 제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울고 싶었다. 자신은 방바닥에 껍데기처럼 움치고 있는데, 청년은 야생의 혼을 세우고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었다.
청년의 몸이 일렁였다. 아우라를 그리며 이마에 깃들기 시작한 혼도 하얗게 일렁였다. 문득 싱그럽다는 느낌이었다. 빛나는 혼이 가볍고 힘차게 움직였다. 분명했다.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확실해지더니, 한 곳을 응시하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바위와 나무를 타고, 거친 절벽과 깎아지른 산들을 넘었다. 바람과 구름을 헤치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속도가 붙어 무섭도록 빠르게 달리다가 휘익, 날아올랐다. 순간 눈부신 설표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청년과 겹쳐 올랐다. 청년인지 설표인지, 환한 몸체에서 두 눈이 별처럼 빛났다. 싱그러웠다. 고통의 탁류를 헤치고 신선한 에너지가 풀려나와 물줄기처럼 자리를 넓혀가는 것을 승은 생생하게 느꼈다. 청년이 입술을 오므렸다.
후우우.
작게, 휘파람처럼 누군가의 이름이 불렸다. 질끈 감은 눈 속에서 나쁜 것을 보는지 찡그리면서, 제 가슴으로 팔을 구부려 거푸 이름을 불렀다.
카르르. 부드러운 여자의 이름 사이사이로 숨소리가 새었다.
방안에 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승은 깨달았다. 아무리 원해도 그는 자신을 제외한 두 사람을 보기 위해 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방은 물밑처럼 더워지고, 청년의 숨소리는 격정으로 치달았다. 껍질처럼 누운 그의 곁에서 청년은 혼신을 다해 사랑하는 여자를 부르며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점에 이르러 숨 막히게 멈췄고, 그제야 고개를 돌린 승은 청년의 구부린 몸이 한 여자를 지극하게 안아 올리는 환영을 보았다. 상처 입고 지친 여자가 천천히 들리어졌다. 가냘픈 몸이 치유의 의식처럼 품에 안겼다. 청년의 감긴 눈에서 움직이던 눈동자가 멈췄다.
표정이 풀리며 창백한 뺨에 홍조가 번졌다. 무엇보다도 청년의 입 끝에 걸려서 차츰 크게 벌어지는 행복한 미소가 승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바람 속의 이파리들이 소리 없이 파장을 일으키다가 온통 반짝이며 한꺼번에 뒤채듯, 청년은 그럴 수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목까지 수줍게 붉어져 버렸다.
승은 부들부들 떨었다. 더 보지 못하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몇 뼘 거리인데도 청년을 밀어버릴 힘이 없었다. 죽어서 털빛이 칙칙해진 짐승처럼 초라하게 이마를 찧었다.
방안 가득 청년의 숨소리가 울렸다. 에로틱하고 열정적이며 평화롭고 아늑한 숨소리는 여러 단계의 열풍소리 같았다. 속삭임과 웃음을 품은 지극한 숨소리였다. 홀려서 듣고 있는 동안 숨소리는 낮아지고 점점 낮게 풀리더니, 가늘어지며 고르게 변했다.
농밀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달콤한 졸음이 승에게 밀려왔다. 승은 기를 쓰고 다가가서 청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볐다. 그러나 굴러떨어졌고, 청년의 붉은 흉터에 뺨이 닿자 소스라쳤다.
눈물범벅이 된 채 청년의 허리께에 머리를 묻고, 승은 눈을 감았다. 한 손은 청년의 옷깃을 꽉 그러쥐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