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파트에선 토마토소스 냄새가 진동했다. 연두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냄비 속을 젓고 있었다.
“외부 미팅이 있었거든. 끝나고 바로 왔어. 국수만 삶으면 되는데 스파게티 만들어줘?”
이따 먹을게. 승은 모처럼 눈꺼풀이 닫힐 정도로 졸렸다. 방으로 가자마자 기절하듯 몸을 눕히고 오 분도 못돼 잠들어버렸다.
… 풍랑에 휩쓸려서가 아니라, 입속의 가시 때문에 승은 비틀거렸다. 아무리 애써도 가시가 뽑히지 않을뿐더러, 더 무성하게 돋아나 끔찍이 아팠다.
놔! 타는 입속에 팔뚝까지 집어넣었지만, 가시에 찔려 입속이 피로 흥건했다.
놓으라구. 놔.
몸이 흔들렸다. 토할 것 같은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가 팔을 계속 당겨서 겨우 눈을 뜬 승은 연두를 알아보고 일어나 앉았다.
“어린애가 돼 가는군.”
“가위 눌렸어? 끙끙거리던데.”
“그냥 놔두지.”
“가위눌려서 죽는 사람도 있다잖아. 땀 흘리는데 안 깨워?”
“뉴스 좀 틀어줘. 작게.”
승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벌처럼 웅웅대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뒤숭숭한 잠에서 깨면 뉴스를 들었다. 내용을 알 수 없는 아나운서의 작은 목소리는 지상에서 가장 단조롭고도 뇌를 자극하지 않는 소음이었다. 승은 뺨을 문질렀다. 쑥쑥 자라나서 입천장을 쏘던 가시의 느낌이 생생했다.
“좀 전에 언니가 택배 보냈더라. 여기서 지낸다고 오빠가 말해줬었어?”
“돌았니? 그 여자 이젠 귀신 반열에 올랐군.”
셔츠를 갈아입는 동안 연두가 박스를 가져와 흔들어보고는, 안에서 펜던트와 카드를 꺼냈다.
“어, 오늘이 오빠 생일이었네?”
은박지를 오린 펜던트에 색구슬로 승의 이름이 서툴게 쓰여 있었다.
“귀여워라. 난 잊어먹고 있었어. 미안.”
딸 아이 은지가 만든 카드를 힐끗 보고, 승은 축축한 바지를 벗었다. 아내가 따로 포장해 넣은 실크박스 속엔, 몇 해 전에 함께 해외여행 갔을 때 베니스에서 그가 만지작거렸던 연보라색 유리 토르소가 있었다. 여행 중에 잠깐 미련 뒀던 물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구해냈는지 황당했다.
“언니 안목 있네? 집이 환해지는 거 같아.”
연두가 진열장에 토르소를 놓고 맥주 한 캔을 주며 ‘축하해, 이따 밤에 케이크 자르자’고 했다.
어쩌자고 아내는 이런 짓까지 할까. 승은 멍청히 앉아 있다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전화를 받은 아내는 믿기지 않는지 더듬거렸다.
“갤러리에 나타나지 마. 그리고 은지가 날 잊어버리게 해.”
“여보!”
“죽어도 예전으로 안 돌아가. 우린 모르는 사이야.”
“난 당신 사랑해요.”
“장난하니? 아니라면 아닌 거야, 왜 그래? 서류나 빨리 마무리해.”
“당신이 문제 있는 사람이래도 상관없다니까요. 정말이지 난 당신 사랑한다구요. 그때 내가 말실수한 것, 후회했어요. 내가 어리석었…”
승은 핸드폰을 꺼버렸다.
담요로 창을 가리고 숨 막히는 걸 참으며 서너 시간 작업했다. 손을 씻고 환기시킨 뒤 어두워진 창밖을 봤다. 그리고 연두가 가져다 놓은 은지의 카드와 은박지 펜던트를 집어서 만지작거리다가 으깨어 버렸다.
늦은 저녁으로 스파게티를 먹고 방을 정리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짐짝에서 꺼냈던 인화기와 낡은 책들을 다시 박스에 챙겼다. 그가 결혼하면서 연두와 살던 집을 떠날 때 남겨뒀던 짐들이, 연두가 이 아파트로 이사 올 때 따라와서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연두가 결혼한다면 미련 없이 다 버려야 할 옛 짐들이었다. 그가 가끔 이곳에 들러서 쉬곤 했던 것도, 이 짐들 때문인지 몰랐다.
열악한 상태에서 뽑은 흑백사진들도 챙겼다. 모두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불완전한 대로 독특한 기시감을 만들어내어, 보정이 오히려 해가 될 만큼 아날로그적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다음날 청담동으로 돌아가 며칠을 바쁘게 지냈다. 숨차게 일하고 지쳐서 거실에 멍하게 앉아 있다가 잠들곤 하던 어느 날, 낯선 전화를 받았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의아했던 승은 닭 기르는 집이라는 소리에 일어나 앉았다. 혼자 나가서 산다던 청년의 동생이었다.
“강서영 씨 사진에 대해 말씀하셨다구요?”
그렇다고 대답하며 승은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