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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면목없군요.”
“다친 데는 없어요?”
청년의 어머니는 승에게 휘둘렀던 장바구니를 마루에 놓고 승을 똑바로 봤다.
“안 그래도 우리 아들에 대해 묻더라고 슈퍼아줌마가 귀띔해줬었는데, 대낮에 우리 집 담 넘는 걸 봤으니 제가 눈이 뒤집히지 않겠어요?”
둘은 어찌어찌 마루에 앉았다.
“늘 열어두시던 대문이 잠겨 편하게 생각했어요. 아드님이 방에 있는데 못 듣는 것 같아서, 올라가 다시 불러보려 했죠. 죄송합니다.”
우물쭈물 떠나면 영영 요주의 인물이 될 것 같아서 승은 재빨리 둘러댔다. 아드님이 어딘가 눈에 익었었는데, 천재 공학도라고 크게 다뤘던 기사도 대단했지만 워낙 출중하게 잘 생겨서 뒤늦게 기억났다고, 자기도 그쪽 공부를 해서 얘기나 나누러 들렀다고 덧붙이자, 청년의 어머니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생 집에 머물다 떠나던 참이어서 마음만 앞섰다고 거듭 사과하니, 주스를 가져와 따라주고 자신도 벌컥벌컥 마셨다.
“처음 만난 날 우리 아들을 웃게 해줘서 실은 고맙게 기억하고 있었어요. 헌데 우리 애는 살 것이 많다고 늦겠다던데…”
그래요? 승은 복잡한 눈길로 청년의 방을 쳐다봤다. 방금 전에 그녀가 그의 등짝을 때리며 공격할 때 튀어나와 꺽꺽거리던 닭이, 큰 덩치를 움치고 쪽마루에 쪼그려 있었다. 청년을 기다리는 품새였다.
“슈퍼에서 귀띔했다니 말씀인데, 아드님 약혼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걱정되시겠어요.”
이런 꼴로 앉아 있는 자신이 한심해서 승은 밀어붙이듯 물었다. 그녀 얼굴에 근심이 끼었다.
“그럼요. 걱정되면서도 누가 나쁜 소문이라도 낼까 봐 제 쪽에선 아무나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답니다. 우리 애가 논문으로 신문에 났을 땐 그저 좋아라 했는데, 티베트에서 돌아온 뒤에 실렸던 기사는 어찌나 흉했는지, 우리 아일 광인취급 해놓고 그 아이 서영이는 벌써 죽은 것처럼 떠들어놨어요. 우린 어떻게든 없어진 사람 찾게 제보자라도 얻으려고 성심껏 얘기했는데,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떨려요.”
“여자분 집에서 많이 힘드시겠군요.”
“그 댁은 티베트에 가서 살다시피 해요. 전단지도 만들구요. 나만 손 놓고 있어 속이 저리죠. 우리 애도 저 지경으로 거의 말을 잃고 마음병을 앓는 중인데, 제가 죽을힘으로 보호하고 돌봐도 도움이 못 돼요.”
금세 눈물이 돌던 여자가 애써 웃자, 승은 한참 닭만 봤다. 자그만 몸집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여장부처럼 거칠게 그를 끌어내리던 상황이 무안했다.
“헌데 얼굴이 왜 그리 상했어요? 딴 사람 같아요.”
“저요? 잠자리가 바뀌어선지 악몽을 꾸네요.”
“애들처럼 악몽을요?”
“그러게요. 덜 컸나 봅니다.”
계절 타서 그런가? 청년의 어머니는 장바구니에서 나물을 꺼냈다.
“나이 들면 꿈도 줄고, 꾸어봤자 잊어먹죠. 뭔 꿈일까?”
“악몽이 대중없죠. 빛없는 심해에선 물고기 얼굴이 뒤틀린다잖아요. 흉하게 일그러지고.”
그런 게 보여요? 상상해보는 듯 조용하더니 나물을 다듬기 시작했다. 옆얼굴 선이 아들의 분위기를 닮아 고왔다. 그녀를 속여서 미안했다. 종일 가게에 나가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낮 시간에만 들키지 않게 왔었는데, 뜻밖에 오후 네 시 무렵 못 볼 꼴로 덜미를 잡힌 셈이었다.
“뭘 많이 사셨네요?”
“우리 둘째가 오거든요. 혼자 나가서 사는데, 자주 못 와요.”
“그 아드님도 수재라면서요? 좋으시겠습니다.”
“같이 드시면 좋을 텐데 우리 큰 애가 워낙 사람을 타서요…”
승의 주머니에서 실로폰 소리가 울렸다. 하트를 곁들인 아내의 문자였다.
― 당신께 줄 선물 샀어요. 좋아할 걸요?
이게 정말 약 올리는군. 승은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허락 없이 들러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아들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해만 안 된다면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닭이 청승맞게 꾸르륵거렸다. 승은 걸음을 떼다가 문득 돌아섰다.
“방금 생각난 건데요, 제가 여름에 사진전시회를 하거든요. 몽골, 티베트, 그러니까 히말라야 지역의 사진이 수십 점 걸립니다. 거기에 약혼자 분 사진을 넣으면 어떨까요?”
“그 애 사진을 왜요?”
여자가 기겁했다.
“전단지 얘길 하셨잖아요. 제가 전시회랑 겸해서 책도 내는데, 그분 얼굴 사진도 포함시키면 많은 사람이 보지 않겠어요?”
겨우 그의 말을 이해한 그녀는 그러나 경계심을 품고 승의 눈빛을 살폈다.
“굳이 사진의 주인을 알리거나 설명할 필요 없어요. 안 그래도 인물 사진이 몇 장 들어가니까 끼워놓으면 혹 제보자가 생기지 않을까요?”
해로울 게 없을 듯하니 아드님과 상의해보라며 집을 나섰다. 닭이 뒤쫓듯 희미하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