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내의 꽃이 불러온 아픈 기억은 어둠이었다. 아늑한 침실과 귀에 꽂히던 속삭임들이 스러지고, 집 떠난 뒤 얼마간 보고 싶던 딸아이 은지도 찻잔 속에서 사라졌다. 대신 저 안쪽, 훨씬 더 안쪽, 대학 삼학년 때의 여름날에 부닥쳤던 어두운 벽과 거기 기대어 울고 선 늙은 남자가 보였다.
피에로처럼 볼터치를 한 남자였다. 분홍색 뺨과 부푼 입술이 얼룩덜룩 괴상했다. 그런 남자를 골목 안으로 끌고 간 서너 명의 젊은 남자도 보였다. 왁자한 비웃음소리와 협박, 한순간에 쏟아지던 주먹질도 보였다.
무자비한 구타 속에 늙은 남자는 뭔가를 죽도록 애원했고, 발에 차이면서도 두 손을 저으며 호소했고, 비굴하게 웃다가 뺨을 얻어맞았다. 섬뜩한 소리가 들리길 몇 번, 바닥에 팽개쳐진 얼굴이 구둣발 밑에 깔리자 무덤처럼 조용해져버린 남자를 밟고 선 녀석이 침을 뱉었다.
“대체 어디서 굴러 온 늙은이야? 더러운 호모새끼. 또다시 눈에 띄면 칼로 확 그어버려!”
발길에 짓이겨지던 줄무늬 양복이 보였다. 옷깃에 꽂혔다가 땅에 굴러 떨어져 함께 짓밟히던 크고 붉은 꽃.
꽃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선병질적으로 보였다. 승은 그 기억을 골똘히 좇았다.
“촌스런 화장 봐라. 어디서 누굴 꼬드겨? 인간 말종 게이새끼, 여기서 그냥 콱 죽어버려!”
피가 튀도록 걷어찬 녀석들이 흐린 빛이 떨어지는 골목에서 실컷 웃다 몰려가버린 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남자가 맨 먼저 꽃을 주워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소중히 옷깃에 꽂았다. 멀어서 냄새를 알 수 없는 꽃은 다만 색깔뿐이었고, 남자는 커다란 꽃을 단 채 벽을 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럽게 눌린 곱슬머리로 남자는 홀로 울고, 울음이 참아지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홀로 울고, 격하게 흐느끼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막느라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승은 겨우 침을 삼켰다.
늙은 남자의 피 묻은 얼굴이 언제나 구석으로 작게 몰리다가 어둠에 완전히 먹혀버리곤 했던 건, 승이 회상하기를 거부하고 늘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하필 처참한 장면을 목격한 밤에, 승의 곁엔 새로 사귄 남자친구가 서 있었다. 둘은 며칠간 벌거벗고 함께 뒹굴다 술 마시러 나온 길이었고, 녀석은 승을 붙잡고 계집애처럼 떨다가 사라져버렸었다.
그 기억까지 떠오르면 승은 더욱 파랗게 질려 도망쳤고, 자꾸만 땅에 떨어지는 꽃을 주우며 쓰라리게 울던 늙은 남자는 매번 구석으로 작게 몰렸고, 몰려서 흔들리다 이지러져 사라졌고, 승은 도망치다 도망치다 초죽음으로 쓰러지곤 했다.
아버지.
찻주전자 든 손이 떨렸다.
아버지.
찻물이 핏물 같았다. 조용하고 인자하던 아버지가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과 똑같이 남자의 사랑을 구걸하던 낯선 모습이, 그리고 눈물을 철철 흘리며 내색 없이 야위어가다가 시름시름 죽어버린 엄마의 모습이 눈을 찔러왔지만, 이상하게도 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승은 모처럼 고통이 덜해서 대학 삼학년 때의 여름밤과, 그날 이후로 피 말리게 살아온 끔찍한 세월을 찬찬히 기억해 나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캄캄한 찻물에 수려한 청년의 얼굴이 얼핏 담겼다. 승은 후들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공포에 질린 퀭한 눈을 떴다.
다음날 비 오는 청담동으로 갔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숙소로 올라가자 지저분한 실내가 한눈에 보였다. 나갈 때 치워뒀던 거실에 후배의 청바지 따위가 널려 있었다. 곁에 있었으면 패줬을 만큼 승은 화가 났다. 히말라야로 촬영 떠날 때, 돈이 없어서 쫓겨났다는 후배가 방을 구할 동안 갈 곳이 마땅치 않다 해서 일주일만 쓰라고 빌려줬는데, 그때 열쇠를 카피해뒀다가 몰래 들어와 잔 모양이었다. 허접한 새끼. 후배의 머리칼이 널렸을 침실을 열어보기도 싫어서 돌아서다가 자신이 돈을 지불하고 사용하는 전체 공간을 바라봤다.
왼쪽에 작업실, 오른쪽 침실 앞엔 쓰레기가 구겨 있고, 거실 시디박스 위엔 왜 그걸 택했던지 가파른 빌딩 사진이 걸려 있었다. 카푸치노 머신 위로 회색 블라인드, 유리가 선물해준 플라스틱 젤리과자 접시, 구석엔 톱니각대가 멋 부리며 놓였고 전체 실내엔 가죽냄새 같은 게 떠돌았다. 이 각도에서 찬찬히 본 적 없어 생소했다.
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숙소로 오지 말고 호텔에서 만나자고 했다. 유리가 밝게 웃었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도 큰 강골이어서 휙휙 걸어가면 주위를 압도할 만치 강한 외모인데도, 목소리가 부드럽고 마음씀씀이가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승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오르다 굳었다. 오늘은 유리가 필요했다. 금욕을 풀기 위해 그녀의 몸이 필요했다. 배설하지 않으면 심신이 썩은 망고처럼 더럽게 터져버릴 거였다.
계단을 내려가며 승은 창밖을 봤다. 어느 길엔가 폐를 흘려버려서 누군가 밟고 있는 듯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