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꽃은 크고 산화된 피처럼 짙었다. 이런 꽃을 사 들고 아내가 퇴근했던 밤에, 승은 침대에서 잡지를 뒤적이며 튀긴 호콩을 먹고 있었다. 중국 다녀온 친구가 몇 봉지 안겨줬던 호콩은 짭짤하고도 고소했다. 저녁은 각자 밖에서 먹고 왔고 네 살배기 은지도 잠든 터라, 아내는 바로 욕실로 가서 기분 좋게 노래를 불렀다. 승은 벽걸이 TV로 영국 싸이코 드라마를 보며 웃다가 잡지를 뒤적이곤 했다.
씻고 나와서 오락가락하던 아내가 꽃이 흐드러진 화병을 안고 침실로 들어섰을 때, 승은 저도 모르게 상반신을 들었다.
“멋지죠? 외국종인데 이름을 까먹었네? 화려해서 눈을 뗄 수가 없더라구요. 오늘 밤의 포인트는 이 꽃이야.”
냄새 좀 맡아보라며 화병을 내밀자 승은 뒤로 피했다. 엄청나게 큰 꽃의 알싸한 냄새와 지나치게 부드러운 꽃잎이 뺨에 스쳤다.
“뭐야 이건.”
“좀 독해요? 뒤에 남는 향긴 좋잖아. 자스민 같기도 하고.”
“얼어 죽을 자스민은. 자스민 향기 몰라? 이건 물 묻은 동전에서 나는 냄새잖아. 고약해.”
“촌스럽게 물 묻은 동전이 뭐에요? 난 이 냄새 좋아. 도발적이야.”
아내는 눈웃음쳤다. 승은 입맛이 싹 가신 얼굴로 치우라고 소리쳤지만, 아내는 샐샐 웃으며 침대 옆 콘솔에 화병을 놨다. 잡지를 든 승은 한 줄도 못 읽고 다시 꽃을 봤다. 쳐다보는 동안 이마주름이 일그러졌다. 아내는 화장대에서 얼굴을 매만지더니 가운을 벗고 은빛 팬티마저 벗은 뒤 침대로 들어왔다.
아늑한 불빛 속에서 아내가 생끗 웃었다. 잠자리로 들어오면 아내는 꼭 그렇게 웃었다. 아이스크림을 앞에 둔 계집애처럼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세상이 다 제 것인 양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승의 등을 쓸고 목덜미를 만진 뒤, 곧장 그의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팬티를 내리며 왼손을 찔러왔다. 그 몇 개의 동작이 언제나 같았지만 승은 아내의 얼굴이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올 때마다 전율했고, 아내는 고개를 흔들며 쿡쿡 웃고는 살갑게 그를 애무하곤 했다.
하지만 그날 승은 아내가 쿡쿡 웃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눈길이 자꾸 꽃으로 갔고, 머물러 떠나지 않았다. 아내가 팬티를 벗겨 내는 기척에 그녀 머리통을 밀어낸 승은 다리를 붙이고 아내를 봤지만, 시선은 그녀를 지나쳐 꽃을 지나쳐 이번엔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왜 그래요?”
“비켜봐.”
“뭐 잘못 됐어요?”
승은 거치적거리는 아내를 떠밀고 등을 세웠다. 꽃에서 천장으로 벽으로, 다시 꽃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독해요? 치울게’, 하며 아내가 화병을 방 끝쪽 화장대로 옮겨다 놓았다.
“이따 밖에 내놓지 뭐.”
머릿속이 웅웅거렸지만 고개를 저어 꽃을 털고, 승은 아내와 섹스를 시작했다. 아내와의 섹스는 버터를 녹이는 놀이 같았다. 교접하는 동안 아내는 커다란 덩어리처럼 그의 밑에서 녹아들었고, 승은 질퍽한 버터를 짓이기며 무엇이든 그가 상상하는 물건으로 그녀를 변형시켰다. 뜨거운 여름날 묽은 진흙 위에 앉아서 흙 놀이를 하거나, 반짝이는 물방울을 뿜으며 헤엄치는 물고기를 타고 멀리 미끄러져 가는 듯도 했다. 아내가 눈을 감고 신음하거나 짧은 비명소리를 낼 때면 아내의 입속에서도 투명한 새들이 파닥거리며 날아올랐다. 언제라도 질리지 않는 놀이였다. 폭발하는 화산, 열매가 흔들리는 올리브 숲, 천 개의 강을 거슬러가는 연어 떼들이 모두 그 놀이 속에 들어 있었다.
그날 아내는 유독 부드러웠다. 아내의 가슴에서 두 팔을 편 승은, 하늘 높이 나는 익조를 탄 소년처럼 소리를 질렀다. 몸속의 헐거운 부분들이 꽉꽉 차올랐다가 시원하게 비워져서 상쾌했다.
그의 등에 아프도록 손톱을 박고 헐떡거리던 아내가 무어라 속삭였다.
“응?”
“당신은 남자와 사랑할 때도…” 라고 아내가 꿈결처럼 말했다. 눈을 번쩍 뜬 승을 아내가 끌어당겨 또다시 귀에 속삭였다.
“당신은 그러니까 그때도…”
순간 승은 멈췄고, 별안간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아내를 밀었다. 그리고 곧바로 침대를 벗어나 나가버린 침실 밖에서 똑같은 꽃을 봤다. 거실 다탁에도 붉디붉은 덩어리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가 미친놈처럼 화병으로 돌진해서 꽃다발을 뽑자 강아지가 짓기 시작했고, 벌거벗은 아내가 앞을 막아서며 붙들었고, 가구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승은 바닥에 꽃을 패대기쳤다. 그런 뒤 바지를 꿰입고 자동차 열쇠를 찾아들었다. 아내가 귀에 남긴 말과, 조깅화를 신고 현관을 나서며 돌아본 거실바닥의 흩어진 꽃들이 그가 떠난 집의 마지막 인상이었다.
찻잔 속의 꽃이 스러졌다. 이어 두 번째 꽃의 기억이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