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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이 캄캄하도록 열을 앓으면서도, 승은 벌거벗은 청년을 놓지 않았다. 사라질세라 죽도록 놓지 않았다. 지난번 청년이 혼절했을 때 그 입술을 만지려다 깍지껴버렸던 손으로, 청년의 알몸을 샅샅이 쓸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베개에 나란히 청년의 환영이 있었다. 눈을 감아도 꿈을 꿔도, 실체인 듯 촉감이 또렷했다.
꼬박 이틀을 끙끙 앓고 난 밤중에, 승은 청년의 집 담 위로 기어올랐다. 화단의 나뭇가지 뒤에 앉아서 불 꺼진 방을 몇 시간이나 내려다봤다. 그리고 돌아와서 파일에 처박아뒀던 흑백사진을 꺼냈다. 청년을 처음 만났던 날, 카메라를 들고 다시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선 골목에서 찍은 그 집 전경이었다. 대문은 닫혔고, 옥상엔 효수된 머리통처럼 산발한 풀 화분이 놓여 있었다.
닭소리가 우렁찼었지. 승은 인화한 뒤 곧바로 찢어버리고 딱 한 장만 남겨뒀던 사진을 매만졌다. 샤워실의 수증기 속으로 들어왔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청년의 환영은, 앓는 내내 승의 곁에 있다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승은 흑백 사진을 품에 안았다. 목말라. 불빛이 고인 방구석을 보며 승은 퀭한 눈을 부릅떴다. 목말라. 목이 타는 거 같아.
나흘째에 겨우 기운을 차린 승은 욕실로 가서 비척이며 찬물을 틀었다. 냉기에 놀란 몸이 적응되자, 여러 번 디뎠던 티베트의 설산들을 생각했다. 비를 맞거나 운동 후 찬물을 뒤집어쓸 때면 그곳 생각이 났다. 처음엔 무심히, 그러다 버릇이 됐는지 이젠 떠올리지 않아도 몸이 먼저 기억하고 불러오기 때문에, 그곳이 그리울 땐 일부러 사워기 밑으로 들어서기도 했다.
티베트의 여가수 양첸이 부르는 ‘아리-로’가 머릿속에 울렸다. 바람 몰아치는 산 위에서 부르는 이마가 깨질 듯 높디높은 가성이, 심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 손발 끝이 저릿저릿했다.
울고 싶도록 청아한 목소리를 따라 청년의 방 벽에 무리 지었던 짐승의 떼가 덩어리를 이루며 떠올랐다. 그 중 한 마리가 심야의 검은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털을 나부끼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야성의 혼을 세우고 빛나는 눈으로 달려가는 흰 동물이, 한 점 꽃처럼 아름다웠다. 눈을 감고 설표를 좇았다. 두 팔을 펼쳐들고 검은 히말라야에서 떨어져 내려 그 눈부신 생명체에 이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존재도 등에 태운 적 없는 설표의 목덜미를 그러쥐고 그 털에 뺨을 부비며 검고 차가운 밤 속을 오래오래 날아가는 동안, 가슴이 트이고 비로소 시원해졌다.
그의 상상은 그러나 히말라야의 신비한 미명에도 밝음에도 이르지 못하고, 설표에게서 멀어져 유영하다가 암흑으로 까마득히 빠져들었다. 설표가 날아간 자리에 당연하다는 듯 청년이 피어나서, 그의 눈을 멀게 해버리겠다는 듯 독하게 빛을 발했다.
나를 어떻게 해버려야 할까. 죽기 전에 이 목마름을 절단 낼 수 있을까.
비틀거리며 샤워기를 껐다. 찬물에 딱딱해진 몸을 세우며 이번 전시장에 양첸의 날카로운 노래를 몇 곡 틀어보면 어떨까, 생각을 딴 데로 틀었다. 촌스럽지만 버리기도 아까운 발상이라며 돌아서다가, 얼른 시선을 내렸다. 수증기가 덜 낀 거울에 얼굴이 너무 또렷하게 비쳐서 순간적으로 놀란 것이다.
다시 세수하고 허리를 편 승은 가만히 한숨 쉬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상쾌함이 부서지기 쉬운 허상임을 깨달았다.
젖은 머리로 거실에서 차를 따랐다. 포트에 다시 담고 따르기를 반복하면서, 청년 때문에 허우적거린 날들을 생각했다.
그렇게 천천히, 애써 사소한 일처럼 몇 날은 고뇌하고 몇 날은 찾아가고, 이런저런 소문을 들으며 골목을 걸어 다니면 청년이 잊혀 질 줄 알았다. 첫눈에 심장에 박혀버렸던 청년을 잘라내려면, 그렇게 무심한 듯 느린 시간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자신 있었다. 청년이 혼절해서 무방비로 누워 있던 방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견뎠다. 피 말리게 참지 않았어도 만지기는커녕 손끝 하나 건들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느닷없는 욕구를 해소하려고 상상 속에서 유리와 얽혀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욕탕의 수증기 속에서 낯선 숨결이 뒷목에 닿기 전까진 그랬다. 유리를 밀어내며, 닭을 안은 청년의 벌거벗은 몸이 시야를 꽉 채우고 확인사살 하듯 들이닥치기 전까진 가능했다.
그 길로 튀어나가 밤새 개처럼 시내를 쏘다니다 돌아와 열병에 빠져버린 그의 곁에, 청년이 줄곧 붙어 있었다. 끙끙 앓으면서도 승은 놓칠세라 청년을 껴안고 몸부림쳤었다.
저번 날 노을이 벌겋던 날에 그를 따라왔다가 떡이 되도록 맞고 통곡하던 깡마른 게이가 생각났다. 내 눈빛이 변했던 걸까. 어떻게 날 발견했을까. 승은 무서웠다.
차를 따르며 훌쩍 늙어버린 눈으로 핏줄이 꿈틀대는 자신의 남자다운 손을 내려다봤다. 청년 주위를 맴도는 게 아니었다. 첫눈에 반해버린 청년의 모습을 눈알에 새기지 말고, 즉시 떠나서 얼씬도 말아야 했다.
찻물 위로 붉은 꽃이 보였다. 청년의 흉터에서 비롯된 꽃의 기억들이, 봉인이 풀린 듯 눈을 떴다. 승은 피하지 않고 들여다봤다. 실체인 양 꽃빛이 징그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