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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로 돌아와 카메라를 꺼낸 승은 힘이 쭉 빠졌다. 찍었던 필름은 빠져나갔고, 디지털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은 말끔히 삭제돼 있었다. 가방을 두고 나가다니 제정신인가. 화가 치밀어 카메라를 동댕이쳤다. 청년의 목을 잡아 흔들고 싶었다.
씩씩거리던 승은 식빵에 잼을 발라 먹고 잠을 청했다가 다시 일어났다. 노트북을 안고 오케이 처리된 마흔다섯 점의 사진을 점검하고, 마음에 덜 차서 보류했던 것들과 여기서 흑백으로 뽑아보려고 골라놓은 사진들을 새 폴더에 옮겼다.
감각적 주제에 플러스가 될 게 없다는 판단으로 빼버렸던 서정적 사진들 중에, 정선의 탕건 쓴 노인이 생뚱맞게 섞여 있었다. 외몽골 지역에서 찍어온 인물들과 사보용으로 찍은 한국의 노인 사이엔, 뺨이 도드라지고 광대뼈 골이 깊은 것 말고는 딱히 공통점이 없었다. 눈빛이 특히 그랬다. 몽골 쪽 눈빛이 조금 멀다면, 이쪽은 흐린 우물처럼 우울하게 패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정리를 마치니 인화해보고 싶었다.
담요를 들고 창가에 붙어 서서 어두워진 바깥 빛을 차단했다. 확대경과 집게 따위를 정리하며 모처럼 일이 손에 붙어 익숙하게 움직였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 사용했던 낡은 기구들 중에서 긁힌 자국투성이인 트레이를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인화액 병뚜껑을 여는데, 액체가 튀어 몇 방울이 발등에 떨어졌다. 구부리고 휴지로 발등을 닦던 승은 돌연 방 가운데 주저앉았다.
유리의 미끈한 나체가 다가오며 하체가 조여 왔다. 이것도 금단현상인가. 열흘 전까지 함께 뒹굴었던 유리의 하반신이 어른거리며 한바탕 광적인 섹스를 치르고 싶었다. 열흘. 열흘째 섹스를 거르긴 여행 때 빼고 처음이었다.
베개를 보고 잠깐 수음을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버텨보자. 승은 욕실로 가서 뜨거운 물을 뒤집어썼다. 몸과 마음을 조금치라도 씻어내야지 이대로 굴리다간 사단이 나고 말겠다고 스스로 브레이크를 건 금욕이었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섹스를 치르듯 쉬지 않고 며칠 동안 유리의 몸에 집착했던 것도, 몸과 마음에서 썩은 망고처럼 악취가 나기 전에 얼마간 금욕해보자는 계획의 대비책이었다.
뜨거운 물 기운에 페니스가 거대해졌다. 뿌리째 아픈 욕망을 차라리 즐기자고 승은 두 손을 마음껏 놀리며 물을 맞았다. 불붙은 수초 속을 미끄러져가는 뱀이 된 기분이었다.
승은 섹스를 죽음으로 여겼고, 욕망과 좌절의 정화조로 삼았다. 짧은 죽음과 긴 잠을 치르고 나면 공복을 채운 듯 세상의 번다한 요구에 얼마든지 응할 수 있었다. 사진작업은 그런 리듬 타기에 적합한 일이었고, 그를 죽음으로 데려갈 여자들은 도처에 있었다. 아내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핸드폰을 바꿔도 갖가지 방법으로 연락해오는 아내. 집을 나온 뒤에 수많은 여자들과 극단적인 섹스를 치렀지만, 아내 생각은 한 번도 없었다.
바람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이어서 거친 폭죽소리를 따라 가열찬 파열음이 귓전에 몰렸다. 열기를 몰고, 흐름을 타고, 승은 고조되며 차츰 위로 날아올랐다. 무거웠던 몸이, 늪에 빠졌던 몸이 풀려나며 위로 위로 상승했다. 더 멀리 더 아득히 더 거침없이, 눈이 멀 만큼의 열락을 안기며.
뱀처럼 흔들리던 그의 몸이 문득 긴장했다. 뒤에서 어떤 기미가 느껴졌다. 승은 물을 맞던 상태로 숨을 죽였다. 벌거벗은 몸 하나가 뜨거운 물 속으로 들어와 조용히 뒤에 멈춰 섰다. 등에 뿜어지는 숨결. 물소리도 사라진 듯 사위에 숨소리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상상 속에 얽혔던 유리의 나체가 스러지고 낯선 숨소리가 뒷목에 생생하게 감겨오자 승은 눈을 감았다. 차오르는 듯, 비어가는 듯, 간지러운 듯, 조여 오는 듯, 안타까운 욕구가 그를 못 견디게 했다.
아득히 혼이 풀어지며 심장이 뻐근하게 아파오자, 승은 힐끗 돌아봤다. 닭을 안은 청년의 뒷목에 도드라진 둥근 뼈. 그 환영과 함께 더운 기운이 승의 등으로부터 쑤욱 빠져나가며 냉기가 전신을 훑었다. 비틀거린 승은 욕탕바닥에 무릎을 꺾고 무너졌다.
드디어 악을 썼다. 그러나 소리는 목에 걸려 터지지 않았다. 샤워기를 돌려서 등을 데칠 듯 뜨거운 물을 쏟아내다가 탕 밖으로 튀어나갔다.
빌어먹을.
서둘러 트레이를 다시 놓았다. 붉은 등을 켜고 네거필름을 꺼냈다. 시큼한 액체를 들이붓는데 손가락들이 떨려서 몇 방울이 또 바닥에 튀었다. 씨팔. 승은 약병을 던져버리고 집이 흔들릴 만큼 소리를 지른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