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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죽을 닭이었죠. 조류독감 땜에 사육장도 폐쇄됐거든요.”
여자를 따라가며 약혼녀에 대해 물었지만, 검정고시로 대학에 패스해서 박사까지 빠르게 따내던 신동이 저렇게 됐다는 청년 얘기만 늘어놨다. 천재라는 소문의 아우라는 재래식 골목이 잔뿌리처럼 남은 동네에서 시간이 가도 빛이 죽지 않는 모양이었다.
“교통사고 당하고 약혼자도 실종됐다면 소문이 요란했겠네요?”
“서영이가 저쪽에 살았으니까 우린 어릴 때부터 늘 봤거든요. 강남으로 이사 가고서도 만날 놀러 왔는데, 실종됐다니까 다들 엄청 놀랐죠. 여기가 서영이 고향인데다, 약혼하기 전부터도 그 집과는 식구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여자 이름이 서영이에요?”
“그 집에 직접 물어보지 왜 자꾸 묻고 다녀요?”
여자가 갑자기 짜증 내며 쳐다보더니, 총총 떠나버렸다. 다시 혼자된 승은 터벅터벅 걸었다.
햇살 쪽으로 걷다 보니 시야가 트이며 꽃이 만발한 골목이 나왔다. 거리를 오가며 가로수의 꽃들만 봤는데, 여기는 오래 모여 산 듯 비슷하게 낡은 집마다 담도 얕고, 골고루 선물 받은 것처럼 봄꽃 투성이었다.
화분이 많이 걸린 집 앞에 서 있는데 맞은편에서 개 한 마리가 걸어왔다. 저도 모르게 웃으며 승은 손을 흔들었다. 휘파람을 날렸더니 건방진 눈초리로 쳐다보고 바로 돌아서 오던 길을 가버렸다. 갈색 무늬가 퍼진 엉덩이가 실하게 실룩거렸다.
“이리 와 봐. 좀 와 보라구!”
골목을 벗어나던 개가 슬쩍 돌아봤다. 뭔가 즐거운 추억이 떠올라 승은 요란하게 불러댔다.
“이름이 뭐냐?”
멈췄던 녀석이 인심 쓰듯 건들건들 다가와 바짓가랑이를 쓸고 갔다.
“숀은 아니겠지? 숀이라기엔 넌 좀 촌스럽잖아.”
털을 만져주니, 눈을 치뜨고는 웃는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내가 기르던 개가 숀이었거든. 만날 나랑 레슬링을 했는데, 학교 갔다 오면 가방 던져놓고 오 라운드 이상 뛰고서야 밥을 먹었지. 하하”
개에게서 지린내가 풍기자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완전 똥개구나. 똥개 좋지. 똥개가 얼마나 착한데.”
둘은 엇박자로 두 손과 앞발을 주고받았다. 흰자위를 잔뜩 늘려 딴 데 보는 척 고개를 돌린 채 맹렬하게 이쪽을 탐색하는 녀석 얼굴에, 함께 뒹굴던 숀의 표정이 들어 있었다.
승은 꽃가지가 담벼락 위로 무진장 쏟아진 곳에서 엉덩이를 아예 땅에 붙여놓고 개와 놀았다. 집들이 낮아서 하늘이 훤했고, 소음도 멀었다.
“좋다야. 널 보니까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뜨거운 게 목에 받혔다. 몸통을 찰싹 붙여온 개를 문지르며 멍하게 하늘을 봤다. 오래전에 살던 집의 파란 지붕이, 잿빛 블록 담이, 통 열매가 맺지 않아 헛똑똑이라 부르던 감나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루 끝에 서서 먼 데를 보며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울곤 하던 엄마의 허깨비 같은 모습들.
그땐 엄마가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우는지 몰랐다. 집의 가장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기 전까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 이유를 알게 됐을 땐 승도 가장처럼 가출해버렸고, 다시 돌아가서 연두를 거두어 집을 아주 떠난 건 엄마가 죽은 뒤였다.
마음이 시린데도 승은 하늘만 봤다. 그러다 느닷없이 소리치며 손을 털었다. 축축한 혓바닥에 맡겨놨던 손을, 개가 질끈 물어버린 것이다. 일어서며 개 옆구리를 된통 차버렸다.
핸드폰이 울렸다. 목소리 큰 광호가 개 대신 짖기 시작했다.
“일 하잔 거야 뭐야. 전화도 없이, 죽은 척 하잔 거야 뭐야?”
”왜 또?”
“글은 두 꼭지 말고 더 없어? 미스 김에게 며칠 더 쉬겠다고 연락하지 말랬다며?”
“며칠에 지구가 멈춰요? 쓸 만한 사진 추가로 들고 갈게요.”
“욕심 부리지 말고 정리된 것부터 가자니까. 참, 어제 강남역에서 니 여자 친구 봤다. 유리 씬 언제 봐도 섹시발랄하드라.”
“나 좀 며칠 냅둬요.”
딴 일도 산처럼 밀렸는데 자꾸 엇나가면 너 죽고 나 죽는다는 엉터리 협박과 함께 전화가 툭 끊겼다. 아마 점심 먹다 무료해서 건 전화였을 것이다. 귀찮았다. 전시 마무리하고 책 내는데 석 달 남짓이면 충분한데, 설쳐대는 광호 때문에 더 어수선했다.
청년의 집 대문은 잠겨 있었다. 담을 타 넘었다. 쪽마루에 카메라 가방만 달랑 나와 있고, 방문도 안에서 잠겨 있었다.
하느님. 승은 저도 모르게 엉뚱한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도 장대 뛰기 선수처럼 이 청년을 휙 건너가겠죠? 승은 개 이빨자국이 난 손바닥을 문질렀다. 안되면 시팔, 죽어버려야겠죠. 고단하다구. 죽도록 고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