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닭이 몇 번 대문을 들락거린 후쯤, 청년이 눈을 떴다.
“밀교도가 따로 없군.”
부서질 듯 맑은 눈빛으로 일어난 청년은 쪽마루의 승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승은 안도와 피로를 느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 뒤, 연두에게서 들은 얘기를 꺼냈다.
“사 년이면 뭔 사단이 생겼겠지? 척박한 곳이니까. 여자를 기다리느라 매일 대문까지 열어둔다던데, 부질없는 일 아냐? 살아 있대도 오래 못 봤는데 그쪽에서 마음이 바뀔 수도 있고.”
어린애처럼 무구한 얼굴의 저 작은 여자. 동네사람들이 여태도 정이 담긴 말투로 기억하는 저 단아한 여자를 청년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한 번도 누구를 깊이 좋아한 적 없는 승으로선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청년의 눈길을 받는 동안 승의 가슴이 조인 듯 아파오면서, 청년의 내부에서 큰 강 하나가 소리쳐 울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벙어린가. 왜 말을 안 해? 사람 말을 못 들은 척 하면 좀 편해?”
승은 머리털이 뽑힐 만큼 사납게 제 머리를 긁었다.
“가끔 그렇게 정신을 놓나? 건강이 안 좋으니 귀찮게 말라고 어머님이 당부하시던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혼절하니까 걱정도 안 되더군.”
청년이 셔츠 위에 체크 남방을 걸쳤다. 쉬고 싶은 듯했지만, 승은 고집스레 앉아 있었다. 곧고 까만 머리칼. 쭉 뻗은 팔과 책을 뒤적이기에 어울릴 담백하게 긴 손가락. 마른 몸매의 청년은 너무도 지친 얼굴이었다. 고통도 어떤 욕구도 없고, 너무 오래되어 엷은 빛을 형성한 슬픔만이 마주 보는 승의 내부에 서늘한 파동을 일으킬 뿐이었다.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는 수족관의 물빛이 여자그림에 동적인 음영을 줬다. 입을 벌려 웃거나 아픔을 호소하는 짐승들이 쳐 낸 흙먼지 속에서, 자그만 여자의 옷자락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목말라.”
승이 중얼거렸다. 닭이 스적스적 들어가 청년에게 파고들었다.
“목이 마르군.”
닭과 청년이 동시에 그를 봤다. 승은 찡그리고 일어나서 누가 부른 것처럼 마당을 질러나갔다.
대문을 나서서 아무렇게나 산 뒤편까지 걷다 보니 재수 굿하던 집에 닿았다.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담벼락에 기대서서 열린 대문 너머로 부위별마다 각을 뜨고 토막 쳐서 잘게 썬 고깃점으로 술판을 벌이고 있는 취한 남녀들을 구경했다.
기분이 더럽고, 한편 홀가분했다. 출력소 매니저와 죽치고 앉아 포토샵 작업하느라 녹초가 된 상태에서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귀찮아 피란 왔다가 엉뚱하게 허우적거렸지만, 휴식도 취했고 글도 몇 꼭지 썼으니 충분했다. 담벼락 틈새에 핀 노란 꽃을 툭툭 건들면서 승은 이 묵은 동네는 머릿속에 야릇한 안개를 지핀다고 웃었다.
늙은 남자가 다가와 술 한 잔을 권했다. 재개발이 될 동네여서 이젠 굿 구경도 못할 거라며 고깃점까지 집어줬지만, 승은 술도 고기도 사양하고 돌아섰다.
느리게 걷는 그의 머리 위로 꽃망울들이 퍼져 있었다. 햇살이 듬뿍 내려 유독 꽃이 만발한 담 아래서 승은 슈퍼에서 봤던 젊은 여자와 마주쳤다. 주인여자에게 닭이 우는 집을 물었을 때, 안쪽에서 뭔가 정리하다가 고개를 빼고 그를 살피던 여자였다. 알은 체하니까, 파마 중인지 눈을 쏘는 형광색 비닐커버를 머리에 뒤집어쓴 여자도 웃을락 말락 고개를 까딱했다.
“닭 말이죠, 학교 사육장에서 도망쳤다던데 왜 저 집서 살아요?”
“또 닭 얘기래요?”
“생긴 게 웃기잖아요. 매일 동네가 떠나가게 울어 제끼는데.”
“혹시 기자세요? 기자라면 그 집 아줌마가 펄쩍 뛰는데?”
“기자가 왜 그딴 걸 찍겠어요? 근데 도망친 닭이 왜 거기 사냐구요.”
“아줌마 고집이 엔간해야죠. 사육장에서 나와서 얘들한테 쫓긴 닭이 하필 글루 들어갔는데, 아들이 잡으니까 가만있더래요. 닭 봤죠? 하하. 아줌마가 머리 염색약으로 물들였잖아요. 학교에서 돌려달라니까, 시골 장에서 직접 사 온 건데 뭔 소리냐고 바득바득 우겼대요. 안 그래도 덩치 큰 닭 꼴이 못 봐주게 웃기니깐, 학교에선 포기해버렸구요.”
“아무나 집어다가 삶아 먹어도 말 못하겠군.”
에이. 여자가 콧방귀 뀌었다. 그 집에선 오래 앓던 아들이 회복된 게 닭 덕분이라고 믿고 있고, 동네에서도 어찌 됐건 아들이 무사한 게 괴상하게 생겨먹은 닭의 영험일지 모른다고 아무도 흉보지 않는다 했다. 약혼녀를 찾으러 열흘, 한 달씩 떠났다 오면 꼭꼭 앓아눕는 아들이 닭 때문에 기운을 차리는데, 누가 탓하겠냐는 거였다. 무당이 신기를 불어넣어 닭을 부적으로 만들었다면 차라리 믿을까, 멍청한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