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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승은 컴퓨터 위에 놓인 사진과 벽 아래쪽에 그려진 작은 여자그림을 번갈아 가리켰다.
“나 저 여자 본 적 있어. 틀림없어. 맹세할 수 있지. 티베트 북부 아야칸트에서 히말라야로 오르는 산길에 깅크 마을이 있는데, 분명 저 여자를 거기서 봤다구. 내가 여기 와서 줄기차게 방문을 두드린 까닭이 그거거든.”
오래 전에 죽은 여자가 아니라면 석 달에 걸친 히말라야 여행길에 정말로 마주쳤음직한 얼굴이었다. 웃는 눈매가 예쁘긴 했지만, 세상 어디서든 가끔 지나칠만한 젊은 여자 미모였다. 승은 입 꼬리를 말며 교활하게 웃었다.
“처음 왔을 때, 저 사진보고 간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어. 티베트에서 정말 잊지 못할 사건을 겪어서 바로 알아봤거든. 틀림없어!”
청년은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러다가 숨소리가 낮아지면서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더니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당황한 승은 눈앞에서 혼절하는 청년을 보면서도 현실감을 못 느꼈다. 푸르스름한 벽에 뒤엉킨 짐승의 떼와, 그 중심에서 인간의 얼굴로 피를 흘리는 거대야수의 그림은 애초부터 현실을 잊도록 승을 설득하고 있었다. 거짓이 그토록 쉽고 가혹했던 것도 그 탓인지 몰랐다.
벌떡 일어섰던 자세로 얼어붙은 채, 승은 다리를 꺾고 뒤로 누운 청년을 멍하게 쳐다봤다. 이내 바람벽으로 옮겨간 눈길이 방바닥 가까이 그려진 두 뼘 남짓한 여자그림에서 멈췄다. 가냘픈 여자는 흰옷을 입고 아이처럼 서 있었다. 동물들의 인도자 같기도 하고, 동물 사이에 버려진 것 같기도 했다.
소란스레 닭이 울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승은 쪽마루로 올라선 닭을 발길로 차버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청년의 면바지를 당겨서 꼬인 다리를 반듯하게 펴주는 동안 승의 시선은 자꾸 방바닥 어딘가로 비껴갔고, 미간은 불편하게 패어들었다.
너절한 얘기를 늘어놓던 때와 달리, 얼음처럼 굳은 그의 귓속에선지 머릿속에선지 이명 같은 게 울렸다. 위험해보이진 않아. 핏기가 돌아오는 청년을 힐끔거리며 얼빠진 표정으로 그 생각만 되풀이하다가, 청년의 코밑에 손가락을 댔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위험하지 않아.
저도 모르게 쪽마루로 튀어나오던 승은 팽개쳐진 카메라가방을 발견하고 청년을 돌아봤다. 청년은 그지없이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먼저 디지털 카메라로 여자의 사진과 책상위에 놓인 몽골 쪽 흐미 계열의 음악시디들을 찍은 뒤, 수동 카메라로 바꿔들고 청년을 집어삼킬 듯 내려다보며 수십 컷을 속사로 눌렀다. 손에 땀이 배었다. 도중에 홀린 듯 서서 청년을 바라보던 승은 어느새 가늘게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문지르며 길죽한 방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벽의 그림들이 그 쪽에서부터 몰려나오고 있던 것이다. 걸어가며 한 점씩 빠르게 찍어나갔다.
마지막으로 옷장과 간이 싱크대가 놓인 어둑한 구석 벽에다 앵글을 맞추던 승은, 깜짝 놀라서 한 동물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 설표?
푸른빛 속에 수많은 몸체가 뒤엉켜있어서 몰랐는데, 구석 쪽 벽에 그려진 두어 마리 짐승에는 점박이 무늬가 꽤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설표라.
히말라야 고지대에 서식하는 흰 표범이 분명해보였다. 티베트 여행자라면 더러 알고 있을 짐승이어서 특이할 것도 없었지만, 그 그림에만 독특한 무늬가 들어 있고, 나머지는 그저 흰 덩어리들로 이어지는 게 묘했다.
설표로 짐작되는 그림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크릴물감과 색연필로 그려진 짐승의 표정엔 희미한 고통이 서려 있었다.
‘그쪽을 못 잊는 모양이군. 하긴 약혼녀가 거기서 실종 됐다니까.’
비로소 목소리가 트인 승은 여전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중얼거리며, 다시 집중해서 설표와 청년을 찍었다. 필름이 떨어지자 청년 곁에 앉아 있다가 배터리가 남은 디지털 카메라로 마당의 닭도 찍고, 빈 물통들도 찍었다. 방문과 쪽마루까지 담은 뒤 어깨를 늘어뜨리고 생각에 잠겨 있던 승은, 카메라 든 손이 청년의 손등에 스치자 선뜻 놀라 떼어냈다.
조금 뒤 그의 손가락이 청년의 뺨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 짧은 순간에 머리꼭지로 피가 몰려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눈가와 이마 위로 움직여가던 손이 입술 쪽으로 내려오자, 승은 제 손가락을 급히 거둬 무릎 위에 깍지를 꼈다.
청년의 얼굴은 더욱 부드럽게 풀려갔다. 한순간에 정신을 놓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숨소리마저 고요해서, 흔들어 깨울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이목구비를 훔쳐보던 승은 햇살이 환한 마당을 내다봤다. 닭은 또 어디론가 떠났고, 세상의 모든 소리도 꺼진 듯 조용했다. 그렇게 밖을 보는 동안 이명도 멎고 생각도 멎고 승 자신도 고요해졌다.
그만 일어서 나오던 승의 신경이 청년의 팔에 가서 걸렸다. 눈을 깜빡거린 뒤 조심스레 청년의 티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승은, 팔뚝의 살을 가혹하게 짓이겨놓고 어깨 위까지 사납게 올라타며 긁어버린 붉은 꽃 모양의 흉터를 분노에 차서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