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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청록색.”
까다로운 발음으로 닭의 깃털 색을 표현하자, 물끄러미 승을 보던 청년이 책상 위의 닭을 당겨서 품에 안았다. 사흘 만에 보는 청년은 승의 기억에 남은 얼굴보다 수척했다.
“페르시안 블루. 바로 그 색이지. 멍든 밤 같은 색.”
그렇게 말하면서 승은 닭을 내려다보느라 수그린 청년의 뒷목에서 부드러운 둥근 뼈를 건너다 봤다. 수족관을 등지고 앉은 청년과, 그 품에 쭈그린 닭대가리의 형태가 탱화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닭은 길들인 개처럼 다소곳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퍼덕거리는 달구새끼를 방안에 들이다니, 더럽지 않나?”
청년은 대꾸가 없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무작정 방문을 열어버렸는데도 탓하는 말조차 없었다.
그젯밤 화장실에서 헤실헤실 웃는 게이 녀석을 과할 만치 패 준 뒤에, 승은 택시를 타고 연두의 아파트로 와서 쓰러져 잤다. 그리고 연두가 출근한 집에서 샤워하고 종일 푹 잔 뒤, 연두의 잔소리를 들으며 저녁을 먹고 다시 잤다. 잠 벌레에 쏘인 듯 완전히 깨어 있기가 힘들었다.
새벽에 눈이 뜨여 청담동 숙소로 간 승은 35밀리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출근 전인 연두는 그가 나갔다 온 줄도 모르고 계란 프라이에 빵까지 구워줬다.
아파트에 혼자 남아서 글을 쓰다가 얼마간 걸은 뒤 청년의 집으로 내려왔더니, 대문은 열려 있고 청년도 집에 있었다. 하지만 기척만 있었지, 몇 번씩 불러도 철저히 무시하고 대답 하나 없었다.
방문 밖에서 예의껏 말을 걸다가 차츰 화가 치민 승은, 자존심이 상해서 돌아서지도 못하고 제풀에 씩씩대며 쪽마루에 앉았다. 그렇게 기다리길 삼십여 분, 성질이 날대로 난 승은 마침내 참을성 없는 성미대로 욕을 퍼부으며 문을 박차버렸던 것이다.
“이 동네는 무지 웃기더군. 길 몇 개를 사이에 두고 몇 십 년 차이의 생활 방식이 공존하더라구. 여기 오다가 어느 집에서 돼지 잡는 걸 구경했는데 말야.”
성깔을 다스리려니 목소리가 갈라지며 생각잖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서울 구석에 돼지 치는 집이 여태 있을까 싶었지만 뭔 상관인가. 마침 여기오기 전에 아파트를 나서서 이리 저리 걷다가 산 쪽까지 올라갔는데, 몇 채만 남은 허름한 구옥 중 한 집에서 재수 굿이 한창이었고, 마당의 차일 아래에 갈색으로 익힌 통돼지가 넙죽 널브러져 있어서 웃다가 온 참이었다.
“청와대가 지척인 도심에서 버젓이 악취를 풍기는 돼지우리도 웃기는데, 장정 몇이 몰려들어서 산 돼지 멱을 따고, 피를 받고, 순대를 만든다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창자를 짓이겨 똥까지 빼더라구.”
몇 살 손아래로 보여서가 아니라 청년을 자극하기 위해서 승은 반말을 썼다. 대화가 안 될 바엔 심기라도 건들어서 충동적인 반응을 얻고 싶었다. 그가 보기에 청년은 타고난 듯 조용한 사람이었고, 습격에 가까운 무례한 방문인데도 떼밀거나 쫓아낼 사람이 아니었다.
청년의 어머니가 아침 일찍 가게로 나갔다가 밤늦어서야 들어오느라 집을 비우는 것도 다행이었다.
“도살 허가서 따윈 나올 턱이 없고, 야매로 잡았다면 민원에 걸릴 텐데 여튼 웃기는 동네에 웃기는 인간들이 말이지…”
승의 거짓 너스레는 돼지 방광에 바람을 넣어 족구를 시도하는 중년남자들의 포즈에까지 자세히 이어졌다. 난삽한 얘기 끝에 승은 죽은 돼지와 청년의 닭이 한 통속인 가축임을 염두에 두고, 우리 밖으로 끌려나온 암퇘지가 어떻게 안쓰러운 비명을 지르며 기르던 주인의 칼에 찔려 숨이 끊어졌는지 치졸할 만치 꼼꼼하게 묘사했다. 청년의 잔상을 떨치려고 도망치듯 동네를 떠났다가 하루 만에 되돌아와 거짓을 늘어놓는 자신이 상스러웠지만, 거친 말을 쏟다보니 견딜 수 없어서 찾아와 애절하도록 말을 시키려는 내부의 불안감과 무시당했던 분이 좀 풀렸다.
청년이 쓰다듬던 닭을 내려놓았다. 마당으로 날아간 닭이 홰를 치며 우렁차게 울었다. 코믹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승은 말없이 울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청년의 손끝에서 닭이 떨군 깃털 하나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저건 신화 속의 짐승인가?”
승이 부러진 늑골에 등가죽이 뚫려버린 야수그림을 가리켰다.
“심하게 다쳤군. 굶주림과 분노를 동시에 품은 짐승의 뇌는 말이지…,”
다음 말을 이으려는데, 청년이 방문을 닫으려했다. 쪽마루의 승은 팔뚝으로 막고 더 활짝 열어버렸다.
청년이 똑바로, 아주 똑바로 승을 봤다. 왜 자꾸 찾아와 귀찮게 하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은 잠시 뿐, 사물을 대하듯 무심하고 투명하게 쏘아보는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승은 고개를 틀면서 짧게 뱉었다.
“여자를 기다린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