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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야 오빠?”
“광호형 사무실.”
“언제 갔어? 집에 와보니까 오빠 없잖아. 저녁 해주려고 마트에 들렀었는데, 말이나 하지.”
“갑자기 일이 생겼어.”
여튼 멋대로야. 연두가 핸드폰을 툭 껐다. 화난 목소리였다. 승은 흥, 웃고 광호와 언쟁을 계속했다.
“책 판형부터 정해야지 공간에 맞춰가며 최종 보정 작업을 하죠.”
“판형이 지금 왜 중요해? 기본 편집도 아직이고 사진에 붙일 글도 하나도 안 썼잖아.”
광호가 두툼한 손을 휘저었다.
“형은 뭘 몰라. 처음부터 출판사에 주자니까 부득부득 맡아가지구선.”
“내가 직접 해 봐야 일을 쫙 꿰지. 니 책이 잘 되면 이참에 출판업에도 진출한다니까.”
“왜 내 책 가지고 그래? 나한테 제일 중요한 시긴데 전문가들이 달라붙어야 승산이 있죠. 지금이라도 맡겨요.”
짜증내는데 또 핸드폰이 울렸다. 회사사보 팀에서 다음 달치에 실을 에세이에 사진 몇 컷을 더 추가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신록이 들어간 풍경이 좋겠다는 말에 그러마고 끊고 나서 승은 남은 커피를 마셨다.
“악착같이 덤벼들어서 겨우 작가 이름을 달게 됐구만, 형이 말아먹을 거야? 내 말대로 해 형. 이제라도 화우 출판사에 넘겨요.”
“밥이나 먹자. 종일 시달렸더니 골 아프다. 쉰다더니 왜 나타나서 따따부따냐.”
광호는 뒷목을 치며 덧옷을 걸쳤다. 그들은 티격태격하며 사무실을 나갔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둘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이상할 정도로 붉은 노을이 천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광호가 허허 웃었다. 자동차와 건물, 가로수와 겅중겅중 걷는 행인들이 열을 앓는 듯 온통 벌갰다.
“뭐가 이래? 봄에 원래 이래?”
“형, 난 어려서 보고 첨이다. 낮잠 자다 놀라서 깨어나 울 때 있잖아. 노을이 무서워서.”
“야, 미치겠다. 대단하다야.”
둘은 천동설을 주장하던 학자처럼 하늘을 보며 걸었다. 저쪽에 뛰어가는 새끼강아지 털까지 붉었다. 한 블록쯤 걷고 나서야 둘은 꿈에서 깬 듯 평소로 돌아와 집적대며 농담을 했다.
“형은 타고나길 예능 매니지먼트나 잘 만든 기성품을 재주 좋게 사고파는 쪽이야. 출판업은 사명감 없으면 힘들다구. 형이 일 년에 책을 몇 권이나 읽어? 책을 사랑하기나 해?”
“뭔 뿔 같은 얘기냐. 책을 사랑해서 책 사업한다는 건 옛날 얘기지. 물건 된다 싶으면 날카롭게 채서 상품 만들고 스타 만들고, 딴 사업과 다름없어. 그리고 난 책 사랑해.”
한 순간, 등 뒤가 서늘했다. 승은 돌아다보려다 말고 걸음을 재촉했는데, 다음 길목에서 광호가 갑자기 휙 돌아봤다. 그와 동시에 깡마른 남자가 그들 곁으로 다가서는 듯 하면서 승을 뚫어지게 봤다. 비린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몸에 딱 붙는 파스텔 톤의 꽃무늬셔츠를 입은 남자는 한 발 앞서나 싶더니 바로 뒤쳐졌다.
“아는 얘냐? 왜 널 봐?”
“아는 얘면 아는 척 했죠. 날씨가 뒤집히니까 별 거지같은.”
승은 아무 거나 먹자고 근처 스파게티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광호가 굳이 일식집에 가서 대구 매운탕을 먹자고 했다.
“머리칼 좀 자르든지 무스로 붙여 올려라. 덥수룩해서 눈에 띄잖아. 남 깔보듯 험하게 째려보는 눈매도 재수 없는데 머리털까지 펄럭펄럭.”
“다시 기르는 중이거든. 여행 다닐 땐 묶어버리니까 긴 게 편해요.”
그러면서 승은 쿡 웃었다.
“저번 여행 때 여자 꼬드기려고 잘라냈잖아.”
“여자?”
“아주 예쁜 애가 게르 앞에 앉아서 동생들 머리칼을 다듬어주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잘라달라고 디밀었지.”
“그래서, 성공했어?”
“흐흐. 이틀을 그 집에서 쉬면서 여자애랑 화끈하게 놀았죠. 그 쪽 애들도 가끔 상상초월로 방자하거든.”
“색놈. 자르고 전처럼 깔끔하게 스타일 내봐. 넌 댄디한 게 어울려.”
“아무렴 어때요? 귀찮아.”
승은 노을을 손바닥에도 받고, 두 팔로도 휘저었다. 광호도 큰 입을 벌려 덥석덥석 노을을 베물었다.
“여행 쏘다니고 오면 꼭 그러더라. 한두 달 지나면 확 바뀌겠지. 여튼 너도 꼴통이야.”
그들이 대구 매운탕을 시키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데, 방 밖에서 아까 그 꽃무늬셔츠가 얼핏 보였다. 승은 본능적으로 광호를 봤다. 물을 들이키느라 광호는 밖의 남자를 못 본 듯했다. 승은 짜증날 때의 버릇으로 한쪽 눈썹을 치키고 수저통을 열었다.
뜨거운 매운탕에 밥을 비우는 동안 광호가 자꾸 술을 마셨다. 입맛이 없어서 밥은 두어 번만 뜨고 승도 대작해서 어지간히 마셨다.
“니 와이프는 요즘도 연락해?”
“그 얘기가 왜 나와요?”
“그렇게 싫으면 법정이혼해도 되잖아. 문자 온다고 신경 쓸 거 없이.”
“내비 두면 지가 할 거예요. 끈기 없는 여자거든.”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엉킨 승은 광호에게 대충 맞추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올랐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데 술 마신 표도 안 나게 멀쩡한 광호가 다른 데서 양주로 마무리하자고 졸랐다. 승은 고개를 젓고 캄캄해진 길에서 광호를 택시 태워 보낸 뒤 숙소로 향했다.
꽤 먼 길을 걷다보니 속이 좀 편해졌다. 숙소 근처에 이르러 가끔 가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을 잘 못하는 승은 두 잔째에 토기를 느꼈지만, 술잔을 놓기 싫어서 계속 따라 마셨다.
문득 비린내 같은 게 코에 스쳤다. 고개를 드니 꽃 셔츠가 곁에 앉아 승을 보고 있었다.
“제가 한 잔 드릴까요?”
“뭡니까?”
“느낌이 좋으시네요. 친구하고 싶은데…”
꺼져. 승의 말에 남자가 입술을 뾰족 내밀며 계집애처럼 웃었다. 취기가 확 올랐다.
“뭐야, 넌.”
“그냥…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요.”
승은 무시하고 술을 더 마시다가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에 토하는데 게이가 분명한 꽃무늬셔츠가 등을 두드려줬다. 몸을 일으킨 승은 화장실 문을 가로막고 간들간들 몸을 흔들며 웃고 있는 꽃 셔츠의 목을 잡고 밖으로 떼밀었다. 몇 번 쥐어 패다가 손아귀에 남은 뾰족한 목뼈의 느낌에 비위가 상한 승은 다시 변기에 엎드렸다.
뭔 짓이냐 이게, 미치겠군.